다섯신부가 붓으로 쓴 예수의 가르침…”잘 쓰려면 마음 비워야”

붓글씨 쓰면서 ‘치유’ 경험…”위로·힘이 되는 글씨 쓰고 싶다”

13일부터 명동대성당 ‘갤러리 1898’에서 합동 전시회 ‘눈길’

붓으로 쓴 예수의 가르침
(서울=연합뉴스) 한만옥 토마스 신부, 정성훈 파비아노 신부, 남덕희 베드로 신부, 용하진 실바노 신부, 도현우 안토니오 신부의 합동 서예전이 13∼22일 서울 명동대성당 지하 전시장인 ‘갤러리 1898’에서 열린다. 사진은 (왼쪽부터) 남 신부가 쓴 ‘我渴'(아갈), 한 신부가 쓴 ‘십자가 영성’, 용 신부가 쓴 ‘용서’. [천주교 의정부교구 민족화해센터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연합뉴스) 이세원 기자 = “두 작품을 작업했는데 (붓글씨를) 쓰고 나서 다음 날 체중을 재 보니 2kg이 줄었더라고요.” (용하진 신부)

“야구나 골프하는 사람들은 (공이) 잘 맞으면 손에 짜릿함이 온다고 하잖아요. 붓글씨도 사실 그런 게 좀 있어요. 획(劃)이 나 자신을 뛰어넘어서 나올 때가 있거든요.” (정성훈 신부)

신부 다섯 명이 서울 명동대성당 지하 전시장인 ‘갤러리 1898’에서 ‘십자가 영성’을 주제로 13일부터 합동 서예 전시회를 연다.

용하진 신부
[용하진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먹을 갈아 붓으로 글을 쓰는 전통문화를 유지해온 나라 자체가 한정된 데다가 가톨릭 사제라는 특수한 직업까지 고려하면 이처럼 신부 다섯 명이 공동으로 서예전을 하는 것은 ‘교회 역사상 처음’이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화제의 주인공은 한만옥 토마스 신부, 정성훈 파비아노 신부, 남덕희 베드로 신부, 용하진 실바노 신부, 도현우 안토니오 신부다. 모두 의정부교구 소속이고 서예가 이동천 박사의 지도를 받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한 신부를 제외한 나머지 4명은 비슷한 시기에 신학교를 다니며 동기생처럼 우애를 나눈 사이다. 도 신부와 정 신부는 중국 베이징에 파견돼 있던 시기에 이동천 선생을 만나 평소 관심 있던 서예의 세계에 더 깊이 다가갔다. 박 신부는 시차를 두고 파견돼 현재 베이징에 머물고 있다. 의정부와 베이징이라는 공간, 서예와 신앙, 이동천이라는 스승을 매개로 5명의 작품이 한자리에 모이게 됐다.

다섯 신부를 지도한 이동천 서예가
[정성훈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용 신부와 정 신부를 전화로 만나 서예 및 이번 전시회에 얽힌 이야기를 들어봤다.

성직자에게 먹과 붓으로 글을 쓴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용 신부는 이동천 박사의 가르침처럼 서예가 글자의 형체를 그리는 것을 넘어 영혼을 새기는 일이라는 지론을 폈다.

글을 쓰고 나서 체중이 감소한 것에 대해 “한 자 한 자, 육체적인 근력뿐만 아니라 마음을 담는 작업을 하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용 신부는 “체력 소모는 심하지만, 정신을 집중해서 그런지 (머리가) 아주 맑아지고 어떤 때는 공중에 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며 “(붓글씨에) 몰입했다가 풀리는 순간에는 운동한 다음에 마무리 운동을 하는 것처럼 마음을 다듬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소개했다.

서예가 예삿일이 아닌 것은 정 신부도 마찬가지다. 십자가와 심장을 형상화한 모양을 그리다가 붓이 부러진 적이 있다. 그는 “획이 그냥 나오는 게 아니다”라고 붓이 주는 무게감을 표현했다.

다만 붓글씨를 쓰면 치유라는 특별한 체험도 할 수 있다고 귀띔했다.

신부는 고해성사 과정에서 인간의 죄를 반복해 접한다. 또 어렵고 힘든 사람들, 괴로움을 겪는 사람들을 위로한다. 인간인 신부에게 이런 활동의 반복이 고될 수밖에 없다.

신부들의 서예전 눈길
(서울=연합뉴스) 한만옥 토마스 신부, 정성훈 파비아노 신부, 남덕희 베드로 신부, 용하진 실바노 신부, 도현우 안토니오 신부의 합동 서예전이 13∼22일 서울 명동대성당 지하 전시장인 ‘갤러리 1898’에서 열린다. 사진은 (왼쪽부터) 도 신부가 쓴 ‘무릇 사람의 선악은 품은 뜻에 달려 있다’와 ‘凡人善惡係於所志'(범인선악계어소지), 정 신부가 쓴 ‘十字聖号'(십자성호). [천주교 의정부교구 민족화해센터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정 신부는 신부가 ‘상처받은 치유자’라고 불리기도 한다며 “(사제들은) 사람들의 상처를 보면서 상처받는다”고 설명했다.

이런 그에게 서예는 잡념을 내려놓는 과정이고, 상처를 치유하는 행위이며, 마음을 수련하는 일이다.

정 신부는 “마음이 좋지 않을 때 쓴 글씨와 기분이 상승했을 때, 혹은 우리끼리 쓰는 표현으로 정신을 놓았을 때 쓴 글씨가 다르다”며 잘 쓰려면 “결국은 (마음을) 비워야 한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회에 내놓는 작품은 모두 35점이다. 다섯 신부 모두 1인당 7점으로 숫자는 같다. 하지만 서폭(書幅)에 담은 문구, 글자체, 먹물의 농담(濃淡)은 ‘5인 5색’이다.

중국 서예전 당시 사진
(서울=연합뉴스) 2016년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서예전 개막식에서 정성훈(왼쪽) 신부와 이동천(왼쪽 두번째) 서예가, 도현우(오른쪽) 신부가 중국 작가 등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정성훈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정 신부는 ‘十字聖号'(십자성호), ‘溫柔謙遜'(온유겸손) 등을 썼다.

한 신부는 이번 전시회의 주제가 된 ‘십자가 영성’ 외에 ‘고통의 신비’, ‘주님의 종’ 등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먹으로 표현했다.

남 신부의 작품 중에서는 요한복음 19장 28절에 나오는 “목마르다”에 착안해 쓴 ‘我渴'(아갈)이 눈길을 끈다. 붓이 종이를 할퀴며 지나간 것과 같은 흔적으로 예수의 목마름과 고통을 표현했다.

도 신부는 한글로 ‘무릇 사람의 선악은 품은 뜻에 달려 있다’고 쓴 작품과 같은 내용을 한자로 표현한 ‘凡人善惡係於所志'(범인선악계어소지) 등을 준비했다.

용 신부는 이번에 선보이는 작품 중 가장 애착을 느끼는 한 점으로 ‘용서’를 꼽았다. ‘용서’라고 크게 쓰고 그 아래에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덧붙였다.

“(요즘 한국 사회를 보면) 누군가의 흠집이나 잘못을 공격하고 나무라기만 하지 용서하려는 마음이 점점 사라지는 것 같아서 특별히 ‘용서’에 신경을 많이 써서 작업했습니다.”

명동대성당
[연합뉴스 자료사진]

정 신부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며 참회와 희생, 극기, 회개, 기도로써 부활 대축일을 준비하는 기간인 ‘사순'(四旬)에 전시회를 열게 된 것에 주목했다. 가톨릭교회에서는 ‘주님 부활 대축일'(올해는 3월 31일) 전 40일간을 사순으로 규정한다.

“사순시기는 하느님의 사랑을 보는 시기입니다. (전시장에 오신 분들이) 글귀를 보면서 좀 생각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신부들에게 붓글씨는 사람들과 소통하는 또 다른 통로가 될 전망이다.

용 신부는 “내 글씨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정말 위로가 되고 힘이 되어주는 그런 글씨를 써보고 싶다는 욕심이 좀 있다”고 포부를 밝혔다.

전시는 22일까지 이어진다. 신부들은 작품을 담은 상품(굿즈)을 판매해 난민들을 돕고 있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집’에 수익금 전액을 기부할 계획이다.

남덕희·한만옥 신부
(서울=연합뉴스) 2023년 10월 경기 파주시 소재 천주교 민족화해센터 평화순례자 갤러리에서 남덕희(왼쪽) 신부와 한만옥(왼쪽 두번째) 신부가 테이프 커팅을 하고 있다. [정성훈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sewonlee@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