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성범죄 당한 중년여성 연기…로마국제영화제서 여우주연상
(서울=연합뉴스) 이영재 기자 = “영화 속 정순처럼 아픔을 지닌 분들에게 ‘끝까지 희망을 잃지 말자’, ‘죽지 말고 끝까지 살아내자’는 희망의 메시지가 전달되길 바랍니다.”
8일 서울 중구의 한 영화사 사무실에서 만난 배우 김금순(51)은 자신이 주연한 영화 ‘정순’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정지혜 감독이 연출한 ‘정순’은 디지털 성범죄를 당한 중년여성 정순(김금순 분)의 이야기로, 17일 개봉한다.
남편을 여의고 딸 유진(윤금선아)과 사는 정순은 지방 소도시의 식품공장 생산라인에서 일한다. 새로 입사한 영수(조현우)와 가까워지지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디지털 성범죄의 피해자가 되고 만다.
경찰은 피해가 크지 않다며 가해자와 합의로 사건을 마무리하는 게 어떠냐고 하고, 정순은 고민에 빠진다. 결국 정순은 부끄러움 같은 걸 떨쳐 버리고 뜻밖의 행동에 나선다.
“그 장면을 연기할 땐 저도 정말 가해자를 죽이고 싶었어요. 그 순간 정순은 ‘모든 분노를 다 터뜨리겠다, 하다못해 멱살을 잡고 욕이라도 한마디 던지고 나와야겠다’는 심정이었을 거예요. 살면서 한 번도 그런 걸 해본 적 없는 정순은 자기 행동에 스스로 놀라면서도 속이 시원하지 않았을까요.”
정순이라는 이름이 있는데도 공장에선 ‘이모’, 집에선 ‘엄마’로 불리는 개성 없는 존재였던 정순은 그렇게 자기 삶의 주체로 선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새 삶을 사는 정순에게 따스한 햇살이 비치는 느낌을 준다.
김금순과 윤금선아의 연기 호흡도 돋보인다. 영화 속 두 배우는 실제 모녀처럼 닮아 보이기까지 한다.
“저나 윤금선아 배우나 누군가의 딸이고, 아이를 키우는 엄마기도 해요. 그렇다 보니 ‘이렇게 하자’, ‘저렇게 하자’고 굳이 말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모녀 관계로 스며든 것 같아요.”
김금순에게 ‘정순’은 처음으로 주연을 맡은 장편 영화다. 그 전엔 조연이나 단역을 주로 했지만, 출연작마다 신 스틸러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지난해 흥행한 유재선 감독의 ‘잠’에서 밤마다 무의식적으로 이상한 행동을 하는 주인공의 문제를 해결해주겠다며 찾아온 해궁할매란 이름의 무속인을 예로 들 수 있다. 김금순은 짧게 친 흰머리에 서늘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코믹한 느낌을 주는 독특한 인상의 무속인을 연기했다.
김금순은 ‘정순’으로 2022년 제17회 로마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으로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당시 ‘정순’은 심사위원대상까지 거머쥐어 2관왕에 빛났다.
“그렇게 큰 상을 받을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영화제에 참석해놓고 시상식을 하기도 전에 귀국해 버린 탓에 국내에서 수상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수상 소감을 영상으로 찍어 보냈죠.”
올해 1월 개봉한 정기혁 감독의 ‘울산의 별’도 김금순이 주연한 장편이다. 이 영화로 그는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올해의 배우상을 받았다.
김금순이 오랜 연기로 쌓아온 내공이 드디어 결실을 이루기 시작한 것이다.
경남 진주 출신으로 중학교 시절부터 연기에 맛을 들인 김금순은 연극 무대에서 활동하다가 결혼하면서 10년의 공백기를 보냈다. 그러다가 자녀가 어느 정도 자란 2010년쯤부터 영화에 출연했다.
“배우라는 직업에 늘 감사해요. 배우가 되기로 했을 때 아버지가 그렇게 반대했지만, 제 생각을 안 바꾼 게 다행이죠. ‘정순’이라는 영화 속에서 윤금선아 배우와 모녀로 살았듯, 배우가 아니라면 이렇게 다양한 시간과 공간을 경험하면서 살 수 있었을까요.”
앞으로 어떤 연기를 하고 싶냐는 질문에 김금순은 이렇게 답했다.
“액션 연기죠. 고단수의 무술 연기가 아니라 제 나이대 여성이 할 수 있는 둔탁한 느낌의 액션, 손을 뻗고, 머리를 잡아당기고, 깨무는 그런 액션 있잖아요. 그런 걸 해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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