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민경 국립제주박물관 학예연구사가 쓴 책 ‘이규보 선생님…’
(서울=연합뉴스) 김예나 기자 = “제가 우둔한 자질로 과거에 합격한 지 벌써 8년이 지났으나 벼슬을 한 번도 제수받지 못하였나이다.”
오랜 공부 끝에 과거 시험을 통과했지만, 관직을 구하는 게 만만치 않다.
자리는 정해져 있고 합격자들은 쌓여가는 상황. 고려를 대표하는 문인으로 평가받는 이규보(1168∼1241) 역시 작은 벼슬자리 하나 얻기 위해 ‘구직 활동’에 나서야 했다.
어려서부터 글 잘 짓기로 이름났던 그가 이런 험난한 인생을 예상이나 했을까.
최근 출간된 ‘이규보 선생님, 고려시대는 살 만했습니까'(푸른역사)는 800여 년 전 고려 시대를 살아간 지식인 백운거사(白雲居士) 이규보의 삶과 자취를 들여다본 책이다.
국립제주박물관의 강민경 학예연구사는 거창한 사건이나 드라마, 휘황찬란한 설명 없이 그 시절 ‘재미있는 아저씨’ 이규보의 삶을 그가 남긴 기록으로 보여준다.
위대한 인물도, 신선 같은 모습도 아닌 그저 ‘옛날 사람’ 그 자체다.
“그는 과거시험에 합격하고도 벼슬을 못 구해 이리저리 ‘이력서’를 넣어야 했고, 술과 친구를 좋아했으며, 나오는 배와 빠지는 머리카락을 걱정하는 동네 아저씨였습니다.”
이규보가 남긴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곳곳에는 흥미를 끄는 부분이 많다.
총 53권 13책으로 이뤄진 문집은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왕 주몽에 관해 쓴 장편 서사시 ‘동명왕편’을 비롯해 뛰어난 시와 문학 작품, 시론 등을 담고 있다.
그러나 강 학예연구사는 귀한 작품보다는 이규보의 진솔한 생각과 감정에 주목한다.
그는 자기 외모에 대해 ‘수염은 거칠고 더부룩하며 입술은 두텁고 붉네’라고 하거나, ‘털이 빠져 머리가 온통 벗겨지니 나무 없는 민둥산을 꼭 닮았네’라고 말하며 쓴웃음 짓는다.
오랜 백수 생활 끝에 40대 후반이 되어서야 6품 참상관에 올라 아무나 찰 수 없던 무소뿔 허리띠를 차게 된 뒤 “허리에 두른 가죽띠(를) 자주 치켜올린다”고 말하는 부분은 웃음을 자아낸다.
그 시절 유명한 술꾼답게 술과 관련한 내용도 많다.
친구가 좋은 술을 보내주자 “때맞춰 내리는 비처럼 상쾌”하다며 즐거워하고, 숙취에 시달리는 사람에게는 노르스름한 때깔의 술 ‘아황주’를 단숨에 마시라고 권한다. 술이 추위를 막아준다며 ‘겨울 모자’라 칭하기도 한다.
이규보가 먹고 마시고 쓴 기록에는 당대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흔적도 있다.
예컨대 그는 “붉은 생선을 회로 쳐서” 안주 삼아 술을 먹었다고 했는데, 강 학예연구사는 “‘생선회’가 등장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기록으로 평가받는다”고 설명한다.
오늘날까지 이규보 이름 세 글자가 기억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강 학예연구사는 그에 대해 “누구보다 치열하게 삶을 산 사람”이라고 강조한다.
“술 마시고 글 지으며 고려라는 나라를 살다 간 이규보, 그가 남긴 고려의 이야기는 넓고도 깊었다.”
적지 않은 분량이지만, 쉬운 설명과 저자가 직접 그린 그림으로 800년 전 ‘고려 아저씨’ 이규보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38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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