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소불위 권력 누리는 8층 역…”통쾌함에서 끝나지 않는 현실적인 엔딩”
데뷔한 지 20년…”이제 시작인 것 같다는 생각도”
(서울=연합뉴스) 오명언 기자 = 죽지 않고 버티기만 하면 엄청난 돈이 쌓이는 혹하면서도 가혹한 쇼. 참가자들은 물도 없이 며칠씩 굶고, 얼굴이 피투성이가 될 때까지 몸싸움하다가, 벌칙으로 서로를 전기충격기로 지지기도 한다.
모두가 점점 초췌해지며 생기를 잃는데, 8명 중 한 명은 늘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있다. 살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동료 참가자들을 지켜보다 발랄한 웃음을 터트리며 이렇게 외친다. “여기 너무 재밌다. 우리 여기서 나가지 말자”
최근 공개된 넷플릭스 새 시리즈 ‘더 에이트 쇼’에서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의 ‘8층’을 연기한 배우 천우희는 23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 한 카페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스스로를 내려놓는 과정의 연속이었다”고 돌아봤다.
‘더 에이트 쇼’는 시간이 쌓일수록 돈을 벌 수 있는 쇼에 참여한 여덟명의 이야기를 그린다.
천우희가 연기한 8층은 쇼가 시작할 때 숫자 8을 무작위로 뽑고, 8층 방을 배정받는다. 거주하는 층에 따라 계급이 뚜렷하게 나뉘는 이곳에서 8층은 무소불위 권력을 누린다.
1분당 1만원이 쌓이는 1층과 달리 8층은 분당 34만원이 쌓인다. 참가자 8명이 나눠 먹어야 할 도시락과 물은 8층 배식구로 전달되는데, 아래층 거주자들은 8층이 음식을 내려주지 않으면 꼼짝없이 굶게 된다.
천우희는 “작품이 절대적인 시간과 상대적인 돈을 소재로 삼아 사회 현실을 풍자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이 재밌게 느껴졌다”고 말했다.
그는 “저는 평소에 맡고자 하는 배역과의 공감이 중요한 사람인데, 8층은 저와 정반대에 놓인 캐릭터였다”며 “‘내가 연기해보면 어떨까?’라는 단순한 호기심으로 접근했고, 이후 캐릭터를 해석하고 연기하는 과정에서 고민이 많았다”고 되짚었다.
8층을 비롯한 참가자 8명은 이들을 관찰하고 있는 의문의 주최 측이 재미를 느낄 때마다 쇼의 시간이 늘어난다는 점을 알아차리고, 주최 측에게 흥미로운 볼거리를 제공하기 위해 머리를 굴리기 시작한다.
초반에 참가자들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거나, 콧바람으로 리코더를 부는 장기자랑으로 주최 측의 관심을 끌지만, 이내 이들의 관심과 보상이 줄어들자 점점 더 자극적인 재미로 치닫는다.
쇼를 더 잔인하고, 자극적으로 이끄는 것은 절대권력을 쥐고 있는 8층이다. 돈으로 무기를 사고, 운동선수 출신 6층(박해준)을 매수해 하층 참가자들을 착취하기 시작하고, 갖은 고문으로 시간을 따내기 시작한다.
천우희는 “8명의 참가자들은 각각 주어진 역할이 뚜렷했는데, 8층은 자극과 유희, 쾌락과 본능적 욕구를 끝없이 추구하는 역할이었다”고 짚었다.
이어 “스스로 세워놓았던 한계를 뛰어넘어 새로운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 도전적인 장면이 많았는데 매 장면이 번지점프를 뛰어내리는 기분이었다”고 돌아봤다.
“감독님을 처음 뵀을 때 과감하게 모든 것을 던져버리고 할 수 있는 열의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어요. 저는 항상 그런 마음이에요. 연기는 번지점프라고 생각하거든요. 신뢰가 있고, 안전장치가 돼 있으면 전 언제든지 뛰어내릴 수 있거든요. 오히려 감독님께 되물었죠. 제게 그런 신뢰를 주실 수 있겠느냐고요. (웃음)”
쇼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난생처음 느끼는 쾌락과 희열을 맛보는 8층은 자신만의 유토피아에서 끝까지 쇼를 즐긴다. 흔한 권선징악형 전개를 비껴간 결말은 찝찝한 뒷맛을 남긴다는 평을 받기도 한다.
천우희는 “이 작품이 말하는 계급 불평등, 그리고 부조리함이 현실적인 엔딩으로 인해 더 강조됐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권선징악으로 끝났으면 통쾌함은 있었겠지만, 통쾌함에서 끝났을 것”이라며 “현실감이 없어서 반대로 또 다른 찝찝함이 남았을 것 같다”고 설명했다.
2004년 영화 ‘신부수업’으로 데뷔한 천우희는 영화 ‘써니'(2011) 속 나사가 빠진 듯한 그 시대 ‘일진’ 이상미 역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이름을 알렸다.
이후 영화 ‘한공주'(2014), ‘곡성'(2016), 드라마 ‘멜로가 체질'(2019) 등에 출연하며 연기 스펙트럼을 넓혀왔다. 현재 방송 중인 JTBC 드라마 ‘히어로는 아닙니다만’에서도 주연으로 극을 이끌고 있다.
천우희는 “배우로서 머물러 있고 싶지 않은 욕구가 크다”며 “배우를 평생 하고 싶기 때문에 저만의 방향성을 갖고 서서히 한발씩 나아가고 싶다. 지금까지 했던 선택이 제 마음 같지 않았던 적도 있지만, 후회한 적은 한 번도 없다”고 말했다.
“제가 데뷔한 지 벌써 20년이더라고요. 세월에 큰 의미를 두지 않지만, 계단을 하나씩 오르고 있다는 생각은 들어요. 이 자리에 오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린 것 같은데, 제대로 하려면 아직 앞이 까마득하다는 생각도 들어요. 이제 시작인 것 같달까요.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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