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못 죽이는 뱀파이어·뱀파이어 통해 자살하려는 인간 이야기
(서울=연합뉴스) 오보람 기자 = 영화에서 뱀파이어는 아무리 변주해도 신선하게 다가오기 어려운 소재다.
여자의 피만을 마시는 뱀파이어(‘드라큘라’)부터 조각 미남 뱀파이어(‘뱀파이어와의 인터뷰’), 인터넷 소설 주인공 같은 10대 뱀파이어(‘트와일라잇’), 금욕적인 신부 출신의 뱀파이어(‘박쥐’), 안티히어로 뱀파이어(‘모비우스’) 등 갖가지 종류의 뱀파이어가 관객을 만나왔다.
뱀파이어 사냥꾼(‘블레이드’)이나 뱀파이어와 사랑에 빠져 그를 보호하는 인간(‘렛 미 인’) 같은 주변부 이야기를 다룬 영화도 많다.
더 이상 새로운 게 나올 수 없는 소재 같지만, 개봉을 앞둔 아리안 루이 세즈 감독의 캐나다 영화 ‘난 엄청 창의적인 휴머니스트 뱀파이어가 될 거야’는 제목부터 어느 정도 기대감을 갖게 하는 작품이다.
휴머니스트와 뱀파이어라는 양립 불가능해 보이는 두 가지 소재가 한데 섞여 있어 호기심을 자극한다.
10대처럼 보이는 68세 뱀파이어 사샤(사라 몽페티 분)가 주인공이다. 그는 인간에게 동정심을 느끼도록 타고나 피를 봐도 송곳니가 돋아나지 않는 병을 앓는다. 60년이 넘도록 뱀파이어로 살고 있어도 인간 사냥을 시도조차 해본 적이 없다.
그는 엄마나 사촌 언니가 구해온 피를 얻어 마시며 살아간다. 냉장고를 열어 병원에서나 볼 법한 혈액 봉투를 꺼내 음료를 마시듯 피를 쪽쪽 빨아먹는 모습에 헛웃음이 나온다.
보다 못한 부모님은 사샤가 사촌 언니와 함께 살며 사냥을 배우도록 한다. 사샤는 차라리 굶어 죽겠다며 격렬히 반항하다가 아버지가 챙겨준 ‘피 도시락’까지 바닥나자 할 수 없이 사촌 언니를 따라나선다.
그러다 우연히 근처에 사는 남자 고등학생 폴(펠릭스 앙투안 베나르)을 만난다. 또 10대 인간과 뱀파이어의 러브 스토리를 다룬 영화인가 싶어 실망감이 들 때쯤 이야기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된다.
우울증을 앓는 폴이 더는 삶에 미련이 없다며 기꺼이 자기 피를 내주겠다고 하면서다. 폴은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아도 삶을 마칠 수 있고, 사샤는 굶어 죽지 않으니 ‘윈윈’이 아니냐는 것이다.
폴의 희생으로 사샤가 비로소 진정한 뱀파이어로 거듭나는 엔딩이 예상되지만, 영화는 이야기를 한 번 더 비튼다.
관람객은 극 후반부가 되면 왜 영화 제목에 ‘창의적인 휴머니스트 뱀파이어’라는 말이 들어가는지도 비로소 이해하게 된다.
‘B급 감성’을 예고하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영화는 시종일관 가볍고 유쾌한 분위기를 유지한다. 간간이 나오는 유머 덕에 미소를 머금은 채 관람할 수 있다.
삶과 인간애,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뱀파이어 블랙코미디로 보여준 이 영화는 제80회 베네치아국제영화제 베니즈데이즈 부문 최우수 감독상을 비롯해 전 세계 영화제에서 19관왕에 올랐다. 제25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도 상영돼 평단으로부터 “음침함 속에서 정묘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이미지 덕분에 더욱 사랑스러운 영화”라고 칭찬받았다.
29일 개봉. 91분. 12세 이상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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