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인간시장’ 김홍신 “국회의원들 간신 되면 그 손주는 어찌 사나”

“당수나 당 실세에 무릎 꿇지 말고, 국민 앞에 무릎 꿇어야”

“의원 출판기념회, 검은돈 받는 비리창구…돈 내역 공개해야”

“의원 특혜 등 해결할 개혁위 필요…정당의 참여는 배제해야”

[※ 편집자 주= 작가 김홍신 인터뷰 기사는 세 차례로 나눠 송고합니다. 이번이 두 번째입니다. 첫 번째는 7월 1일 [삶] ‘인간시장’ 김홍신 “국회의원 연봉, 공무원 과장급 정도면 충분”이라는 제목으로 송고됐습니다. 다음 주 초반에 나가는 세 번째 기사는 문학적 성취 등 나머지 내용을 담을 예정입니다. 자서전적 인터뷰이다 보니 내용이 매우 길고 개인적 스토리가 들어 있습니다.]

연합뉴스와 인터뷰 중인 김홍신 작가
[촬영 김연수]

(서울=연합뉴스) 윤근영 선임 기자= “국회의원은 모두가 각각 헌법기관입니다. 당수나 당 실세한테 무릎을 꿇지 말고 국민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정치 팬덤들의 공격에도 굴복해서는 안 됩니다. 나중에 후손들이 국회의원을 지낸 아버지나 어머니, 할아버지나 할머니의 간신 행위를 알고는, 부끄럽고 괴로워서 이 땅에서 살 수 없는 일이 생길 수 있습니다. 갈수록 사회의 도덕 수준이 올라가기 때문에 지금은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더라도 나중에는 그 행위로 인해 간신으로 평가받을 수도 있습니다.”

작가 김홍신(77)은 지난달 14일과 24일 연합뉴스와 두차례 인터뷰에서 “약간의 시간이 흐르면 해당 국회의원이 간신이었는지, 간언을 한 사람인지 금방 확인된다”면서 “그러니 국회의원들은 특권과 개인적 이익 모두 버리고 권위와 명예만 갖고 국민을 위해 일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국회의원들이 출판기념회를 하면서 책이 몇부나 나갔고, 돈은 얼마나 들어왔으며, 그 돈은 어디에 썼는지 공개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면서 “출판기념회는 국회의원들이 검은돈을 받는 비리의 창구”라고 했다.

김 작가는 “국회의원이 자기 지역구의 지자체장과 지방의원 공천을 좌지우지하고 있는데, 이 과정에서 뇌물수수 등의 부정이 발생하는 것도 문제”라고 했다.

그는 “당수가 수준 미달의 사람을 국회의원 후보로 공천하는 것을 막기 위해 투표용지에 기권란을 만들고, 기권에 투표한 사람이 일정한 비율에 도달하면 재선거하도록 하는 방안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충남 논산에서 성장하고 건국대 국문학과를 졸업한 김홍신은 1981년 소설 ‘인간시장’이 한국 최초의 밀리언셀러가 되면서 유명 인사가 됐다. 이 책은 지금까지 560만부가 판매됐다.

그는 1981년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KBS, MBC 등에서 방송 활동을 하면서 특유의 말솜씨와 유머 감각으로 인기를 끌었다.

그는 1996년 통합민주당, 2000년 한나라당 소속으로 각각 비례대표 의원이 됐다. 의원 시절 8년 내내 자기 소신을 굽히지 않아 ‘상습적 당론거부자’라는 별명이 붙었고, 매년 의정활동 1위 평가를 받았다.

국회의원 특권폐지 위한 헌법개정 궐기대회
2024년 3월10일 오후 서울 종로구 보신각 앞에서 열린 국회의원 특권폐지를 위한 헌법개정 100만 궐기대회에서 나라사랑공생시민운동본부 회원들과 참가자들이 손팻말을 흔들고 있다.
[연합뉴스 사진]

<※ 편집자= 바로 아래 내용은 7월1일 송고한 [삶] ‘인간시장 김홍신 국회의원 연봉 공무원 과장급 정도면 충분” 인터뷰 기사에서 김홍신 작가의 답변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국회의원 세비는 연간 1억5천700만원인데, 공무원 과장급 이하 정도의 월급으로 줄여도 충분하다. 월 400만원도 가능하다고 본다, 국회의원 자리는 생계의 수단이 아니라 봉사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국회의원이 KTX 특실, 비행기 비즈니스석, 공항 귀빈실, 공항 귀빈 주차장을 공짜로 이용하는 것은 잘못됐다. 의원회관 내 병원, 사우나, 이발관 등을 무료로 이용하는 것도 말이 안 된다. 국회의원 가족이 의원회관 내 병원을 무료로 이용하는 것은 더욱 납득하기 어렵다. 항공사가 국회의원에게 좌석 등급을 비즈니스에서 퍼스트클래스로 올려주기도 하는데, 그건 100% 뇌물이다. 의원실 45평도 규모가 너무 크다. 나는 의원 시절에 의원 방과 보좌진 방 벽을 허물었다. 그러니 누군가가 찾아와서 부당한 로비를 하는 게 불가능했다.

국회의원 불체포특권, 면책특권은 왕조 권력 같은 시절에나 필요한 것이므로 빨리 없애야 한다. 그래야 국회의원들이 정신을 차린다.

국회의원 특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정치개혁 위원회를 만들어야 하고, 이 위원회에 정당 참가를 배제해야 한다. 정치권 특권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한국 정치에 큰 문제가 생길 것이다. 국회의원 급여를 낮추고 특권을 없애면 놀라운 능력이 있는 각계의 인사들이 국회에 들어온다.

스무살 시절의 김홍신
[본인 제공]

다음은 이번 두 번째 인터뷰 기사의 일문일답.

— 본인은 초등학교 시절 왕초 노릇을 했다고 하던데.

▲ 논산의 우리 동네에 여러 패거리가 있었다. 동네 왕초를 정할 때 싸움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싸움은 질 때도 있고, 이길 때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른 방법이 있었다. 철교 위의 철로에 귀를 대고 기차 오는 소리를 듣고 있다가 가장 늦게 일어나는 사람을 왕초로 정하는 것이었다. 적절한 시점에 일어나 공굴다리(콘크리트 다리) 위 침목 간격이 넓은 곳까지 달려가서는 아래로 푹 뛰어 내려갔다가 기차가 지나가면 올라오는 게임이다. 달빛도 없는 캄캄한 밤에 그런 일을 벌였는데, 그건 어른들이 알면 안 되기 때문이다. 기차는 호남선 쪽에서 커브를 지어 논산의 우리 마을로 올라오는데, 철로에 귀를 대고 있으면 팍팍팍팍 소리가 들리고 가슴은 벌렁벌렁 뛴다. 나는 그 철로에서 가장 늦게 일어나는 아이여서 동네 왕초가 됐다. 그때가 초등학교 3∼5학년 때였다.

— 본인은 ROTC(학군사관후보생) 장교로 군대를 다녀온 직후에 한센병 환자를 위한 단체에서 일한 적이 있다고 하던데.

▲ 군대에서 제대한 직후였다. 어머니가 관리하는 계가 파산해 우리 집 경제 사정이 안 좋았다. 당시 건국대 총장께서 이를 아시고 나를 선명회에 소개해줬다. 지금의 월드비전이다. 선명회 산하에 한센병 진료소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2년간 홍보부장을 했다. 나는 그곳에서 ‘새빛’이라는 잡지도 만들었다.

— 왜 2년 만에 그만뒀나.

▲ 나는 한센병 환자와 많이 어울렸다. 그들을 끌어안고, 같이 밥을 먹기도 했다. 당시는 한센병 환자들 사이에서 태어난 건강한 자녀들을 외국으로 입양 보내는 일이 많았는데, 나는 그런 일로 많이 싸우기도 했다. 한센병 자녀들은 건강해도 한국 학교들이 받아주지 않으니 해외 입양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그 일을 그만둔 것은 진료소 책임자와 싸웠기 때문이다. 그 책임자는 보건사회부 공무원과 결탁해 이권 사업과 관련한 부정행위를 저질렀다. 나는 그러지 말라고 소리를 지르고는 발로 책상을 걷어차고 나왔다. 내가 최초로 쓴 장편소설 ‘해방영장’에는 이런 한센병 환자들의 이야기가 들어있다.

포니2 자동차
1986년 생산돼 1987년 등록된 1천400cc 포니2 자동차. 김홍신은 포니2 승용차에 어머니를 모시고 논산 공설시장을 다녔다.
[사진은 울산박물관 제공]

— 본인은 소설 ‘인간시장’ 이후 오랫동안 방송 생활을 했는데,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 소설 ‘인간시장’이 히트를 친 직후인 1981년 가을쯤에, MBC에서 연락이 왔다. ‘별이 빛나는 밤’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0시의 플랫폼’이라는 프로그램의 진행을 맡아달라는 제안이었다. 나는 오전 1시부터 2시까지 진행했는데, 청취자들이 보내온 사연을 소개하고, 신청하는 음악도 틀어줬다. 이 프로그램은 인기가 있었다. 당시는 야간에 일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 방송을 들으면서 일을 했다고 한다. 이걸 시작으로 나는 여러 방송 프로그램을 맡았다. 1991년에는 MBC가 방송 사상 최초로 ‘아침의 창’이라는 아침 토크쇼를 만들었는데, 내가 송도순 여사와 진행을 맡았다.

— 방송 출연에 대해 부모님은 뭐라고 하셨나.

▲ 우리 시골 마을 사람들은 신문을 안보니 내가 연재소설을 써도 아무도 몰랐다. 그런데 내가 방송에 나오면 동네에서 난리가 났다. 평소에 말씀이 없으신 아버지도 내가 논산 집에 내려가면 “방송 잘 봤다. 고맙다” 딱 두 마디만 하셨다. 어머니는 내가 내려온다고 하면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해놓으셨다. 그런데도 아직 더 살 것이 있다면서 시장에 가자고 했다. 그러면 나는 포니2 승용차에 어머니를 모시고 시장에 갔다. 당시는 손으로 돌려 승용차의 창문을 열 때였다. 어머니는 본인이 직접 앞뒤 양옆의 창문을 모두 열어놓으셨다. 논산 공설시장의 내부 길은 너무 좁아서 차가 간신히 지나갈 정도였는데, 어머니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00 엄마, 우리 아들 왔어”라고 하면서 자랑했다. 나는 그 좁은 골목에서 천천히 차를 몰고 20∼30분간 돌아다녀야 했다. 맨 마지막에 어머니는 별것 아닌 것을 하나 사셨다. 나는 그때 “아, 이게 효도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1995년 6월 삼풍백화점 붕괴 현장
중간 부분이 푹 꺼져버린 삼풍백화점 붕괴 현장. 마치 쌍둥이 빌딩처럼 마주보고 있는 삼풍백화점의 잔해 건물이 붕괴 순간 처참했던 상황을 말해 주고 있다. [연합뉴스 사진]

— 본인은 방송하다 쫓겨난 적도 있는데.

▲ 1990년 노태우 대통령 시절이었다. 내가 저녁 방송을 하기 위해 KBS 건물로 들어설 때였다. 기자들이 시위하는데, 경찰이 방패로 기자들을 찍었다. 한 사람이 쓰러져 피를 흘리기에 나는 달려가서 손수건으로 지혈했다. 그리고 경찰한테 “책임자 나와라”라고 소리를 질러댔다. 피를 흘렸던 기자는 의무실로 옮겨졌고, 나는 화장실에 가서 피에 물든 손수건을 빨았다. 나는 바로 방송에 들어가 오프닝 멘트를 하면서 노 대통령을 강하게 비판했다. “금방 경찰이 기자를 방패로 찍어서 피를 흘렸다. 이게 민주 국가냐?. 대통령이 정치를 잘 못하니 이따위 일이 생기는 것 아니냐”고 했다. 나는 흥분한 상태로 이런 말을 했고, 바로 쫓겨났다.

— 김영삼 대통령 시절에도 방송하다 하차했다고 하던데.

▲ 그분이 대통령으로 있던 시절에는 사고가 자주 났다. 성수대교가 끊어졌고, 삼풍백화점이 무너졌다. 1995년 KBS2 라디오 ‘안녕하세요 김홍신 김수미입니다’ 프로그램을 진행할 때였다. 그날 방송 직전에 동료 진행자인 김수미 여사에게 “오늘은 오프닝을 나 혼자 할 테니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음악만 소개해주세요”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미리 써온 원고를 1분 동안 읽었다. 나는 “대통령이 정치를 잘해서 이런 사건과 사고를 예방해야 하는데 그렇게 못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국가라고 하지만 대통령한테 권한이 너무 집중돼 있다. 김 대통령은 출마했을 때 권력 분산에 대해 약속했는데, 그걸 지키지 못했다. 그러니 대통령은 정신 차려야 한다”고 했다. 평소 같으면 김수미 여사가 책상 아래에서 발로 나를 차서 말하는 것을 끊어주는데, 이번에는 가만히 있었다. 나는 그 프로그램에서 바로 하차 됐다.

당나라 간언의 상징적 인물 위징
김홍신은 우리나라 국회의원들도 위징을 본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인터넷 캡처 사진]

— 국회의원들은 각각 헌법기관인데, 당 리더나 실세들에게 꼼짝을 못 하고, 팬덤들이 무서워서 아무 말도 못 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데.

▲ 당 리더나 팬덤에 굴복하는 순간, 역사에서 뭐로 남는지 아는가?

— 뭐로 남나?.

▲ 간신으로 남는다. 지금 대한민국 정치는 간신의 보급소라는 비판을 받는다. 정당이 전국에 간신들을 지역에 할당해 배급한다는 비판도 있다.

— 지금 말하는 간신은 어떤 사람을 말하나.

▲ 간신은 자기 소신에 따라 판단하지 못하고, 당론이나 당수, 당 실력자의 뜻에 따라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이다. 옛날부터 무사는 칼에 죽고, 문사는 간언에 죽는다고 했다. 충신은 바른말을 하다 죽는 것이다.

— 정치 팬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 요즘 정치인들은 팬덤에도 굴복하는데, 팬덤은 정치를 파괴하는 무기다. 나는 이에 대한 반성과 반작용이 나타나면서 한국 정치가 좀 더 나아질 것으로 기대한다.

— 국회의원들은 다음에 또 한번 국회의원을 해볼 생각이 있어서 당 리더나 실세, 팬덤에 머리를 수그리는 것 아닌가.

▲ 국회의원이 되면 누리는 게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처음에는 바른말을 하겠다고 각오하고 국회의원이 됐는데, 와서 보니 너무 좋은 자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다음에 또 한 번 해야겠다는 결심을 한다. 당수 앞에 딱 무릎을 꿇는 이유다. 내가 항상 주장하는 것은 국회의원은 당수 앞에 무릎을 꿇지 말고, 국민 앞에 무릎을 꿇으라는 것이다.

— 그런 면에서 후배 정치인 중에서 괜찮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있나.

▲ 이번에 국회의원이 되지는 않았지만 금태섭, 박용진 같은 사람은 소신 있는 정치인이라고 생각한다.

— 후배 정치인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 다시 한번 강조하는데, 국회의원은 국민 앞에만 무릎을 꿇어라. 그리고 역사를 인식하라. 시간이 조금만 더 지나면 간신인지 간언을 한 사람인지 반드시 역사에 기록된다. 국회 속기록만 봐도 바로 들통이 난다. 인공지능 등을 이용하면 버튼만 눌러도 어떤 국회의원이 무슨 행위를 했는지 바로 나온다. 그러니 국민이 준 권위와 권력을 국민만을 위해 사용하라. 개인의 이익을 챙기지 마라. 멀지 않아 간신인지 충신인지 드러난다는 것을 무섭게 생각하라. 나는 TV 등에서 함부로 말하는 정치인들을 보면 걱정된다. 저 사람들의 후손은 이 땅에서 살면서 얼마나 괴로울까 하는 생각을 한다.

2001년 12월25일 농성 중인 김홍신 의원
한나라당 김홍신 의원이 의원회관 내 자신의 사무실에서 건강보험 재정분리라는 당론에 반대하다 국회 보건복지위에서 축출당했다. 그는 이에 항의하는 농성을 하고 있는 중이다.
[연합뉴스 사진]

— 본인은 국회의원 시절 소신을 지킨 사람으로 많이 알려졌는데.

▲ 내 별명은 ‘상습적 당론 거부자’였다. ‘빈 라덴’이라는 별명도 있었다. 내가 한나라당에 있을 때는 홍보위원장이었다. 당 총재와 자주 만나는 중요 직책이었지만 나는 계속 이회창 총재와 맞붙었다. 이 총재는 의약분업을 연기하자고 했는데, 나는 강행하자고 했다. 내가 사사건건 당론을 따르지 않고 반대를 하자 이 총재는 나를 보건복지위에서 환경노동위로 쫓아냈다. 나는 내 방에서 이에 항의하는 농성을 벌였다. 나는 헌법소원도 냈는데, 헌법재판소는 기각 결정을 내렸다. 당의 일은 당에서 알아서 하라는 것이 당시 헌재의 판단이었다.

— 본인은 당원권 정지 징계도 받았는데.

▲ 그때가 2003년 봄이었다. 당시 김두관 행자부 장관을 탄핵하는 안건이 올라왔다. 김 장관이 부정 선거를 할 염려가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표결하는 회의장에 민주당은 당론으로 아예 들어오지 않았고, 한나라당 의원들만 입장했다. 반대는 1표였는데, 그 표를 던진 사람이 나였다. 그 결과 징계위원회가 열렸다. 징계위원 중에 영화배우 출신 신성일 의원만 징계에 반대하고, 나머지는 모두 찬성했다.

대정부 질문을 하는 김홍신 의원
2001년 2월 15일 김홍신 의원이 사회문화 분야 대정부질문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사진]

— 본인은 국회의원 시절에 청렴한 의원으로 선정되기도 했는데.

▲ 그게 내 힘만으로 된 것이 아니었다. 내가 국회의원이 됐다고 하니 친인척이나 주변 사람들이 어머니한테 와서 여러 가지 부탁을 했다. 나한테 직접 말하기 어려우니 어머니를 찾아간 것이다. 어머니는 냉정하게 거절했다. “나는 우리 아들을 그렇게 안 키웠다”면서 되돌려보냈다. 그러니 어머니가 욕을 다 먹었다. 친구들도 나한테 들어오는 부탁을 차단했다. 그들은 누군가가 부탁하려 하면 “그 사람한테 그러지 마라. 지금까지 자기 성질대로 살았는데, 부탁하는 순간, 너와의 인연이 끊어진다”고 했다.

— 국회의원이 되면 돈 봉투를 갖고 오는 사람들이 있나.

▲ 국민들이 그렇게 생각할 일들이 과거에 많았다. 내가 국회의원이 되자 이름을 대면 알만한 사람이 봉투를 들고 찾아왔다. 나는 돈 봉투를 거부하고 엘리베이터까지 모셔다드렸다. 1주일 뒤에 그분이 또 오셨다. 나는 “그러면 제가 이걸 검찰에 넘기고 고발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선배님, 이거 가져가세요”라고 정중하게 이야기했다.

— 국회의원 수뢰가 적발되는 것은 빙산의 일각이라고 국민들은 생각하는 듯한데.

▲ 국회의원들이 돈을 많이 받을 것이다. 불과 10여년 전에 있었던 일이다. 대학 교수를 하는 나의 제자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가 재직 중인 대학교 이사장님이 밥을 한번 먹자고 요청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분을 잘 모르니 밥을 얻어먹을 수 없다고 했더니 제자는 반드시 식사해야 한다고 했다. 그 이사장님은 “국회 복지위 소속 의원들에게 봉투를 다 돌렸는데, 안 받은 사람은 김홍신뿐이었다. 그러니 밥을 사야 한다”고 했다고 제자는 전했다. 결국 그분을 만났다. 나도 그분도 각각 자신이 쓴 책을 들고 나가서 주고받았다.

— 복지위 소속 의원들 모두가 돈을 받았다는 이야기인가.

▲ 그건 모른다. 그분의 말씀이 그렇다는 것이다.

— 정부 쪽 사람들도 국회의원에게 돈을 주려 하나.

▲ 어떤 분은 장관이 되자마자 나한테 돈 봉투를 가져왔다. 나의 보좌진과 식사하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감사합니다. 우리 보좌진과 식사하겠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거는 내 돈이죠?. 그럼, 장관이 되신 것을 축하한다는 의미로 이걸 드릴 테니 장관님이 간부들과 식사하십시요”라고 했다. 그분은 “왜 이러십니까?”라고 했고, 나는 “내 돈이니 내 마음대로 하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그랬더니 그 분은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라고 하고는 돈을 그대로 가져갔다,

카드 단말기
일부 국회의원 또는 후보자들은 출판 기념회 때 카드 단말기를 갖다 놓고 돈을 받기도 했다.
[인터넷 캡처 사진]

— 요즘에도 국회의원들은 출판기념회를 통해 검은돈을 받는다고 하던데.

▲ 나는 책을 많이 쓰는 사람이지만 국회의원 시절 8년간 한 번도 출판기념회를 하지 않았다. 일부러 안 했다. 그건 돈을 받는 행사이기 때문이다. 나의 지인은 “출판 기념회를 한번 하면 돈이 몇억원 들어온다”고 했지만 나는 “인생을 바르게 살아보겠다”면서 하지 않았다. 국회의원들을 보면, 출판기념회를 통해 돈이 얼마나 들어왔는지 밝힌 사람이 없다. 책은 몇부가 나갔고, 돈은 얼마나 받았고, 총액은 얼마이고, 그 돈은 어디에 썼는지 밝혀야 하는 것 아닌가?. 이걸 공개하는 의원이 없는 것은 그 돈이 부정한 돈이기 때문이다. 국회의원이 아니라면 출판기념회 한다고 해서 어떻게 그 많은 돈이 들어오겠는가?. 이건 국회의원들의 비리다.

— 출판기념회를 하면 누가 돈을 가져오나.

▲ 국회 상임위 산하에 관련 기관들이 많다. 과거에는 상임위 중에서 국토교통위가 의원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가장 인기가 없는 곳이 보건복지위와 환경노동위였다. 16대 국회의원 때 보건복지위를 신청한 의원은 나 1명밖에 없었다. 아무도 안 하려 하니 할 수 없이 포철(포스코) 회장 출신의 박태준, 국무총리를 지낸 김종필 등 원로들이 왔다.

— 국회의원이 지역구 지방의원과 지자체장 공천을 좌지우지하면서 돈을 받는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 지방의원과 지자체장 공천을 위한 추천위가 만들어지긴 하지만 결국은 그 지역 국회의원이 원하는 방향으로 간다. 그러다 보니 돈을 들고 오는 사람이 있어 말썽이 생기는 것이다. 지자체장 또는 지방의원을 하려고 4년 내내 그 지역 국회의원 재선 운동을 하는 사람도 있다. 물론, 공천은 그 지역 국회의원 뜻대로 안 되는 경우가 있다. 당 대표나 당 원로가 특정인에게 공천을 주라고 하면 이를 거부할 방법이 없다.

— 국회의원이 국민의 돈으로 해외여행을 가는 것도 문제라는 지적이 있는데.

▲ 국회의원들은 대체로 해외 시찰과 일반 관광을 섞어서 일정을 만든다. 이는 잘못된 것이다. 해외 시찰을 다녀온 국회의원은 정확하게 보고서를 제출하고, 그것은 국민에게 공개돼야 한다. 지금은 시민단체가 공개를 요구해도 잘 나오지 않고, 공개해도 별 내용이 없다. 전부 요약분이기 때문이다.

연합뉴스와 인터뷰 중인 김홍신
[촬영 이은도]

— 정치인들이 낙선 후 기관장으로 내려가는 낙하산 인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 어떤 기관에 전문가를 내려보내는 것은 나도 찬성한다. 그렇지만 전문성이 없는 사람인데도 선거 때 도와줬다고 해서 기관장 자리를 주는 것은 문제가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16대 국회의원을 마친 나에게 고맙게도 장관급 정부산하 기관장 자리들을 세 번이나 제안한 적이 있었지만 나는 세 번 모두 거절했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것 중 하나가 내 이름 앞에 낙하산이 붙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 지인은 “제발 좀 가세요. 사모님이 돌아가셔서 생활도 편치 않은데, 거기 가면 차 있죠, 기사 있죠, 직원이 수천 명이나 있지 않습니까”라고 했지만 나는 가지 않았다.

— 전관예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 그 전관예우 때문에 대한민국의 비리가 확산됐다고 본다. 청문회를 보면 현직에서 물러난 뒤 불과 1∼2년 만에 몇십억원을 벌었다는 데, 젊은 사람들이 뭘 배우겠는가. 어떻게 하든지 높은 자리로 올라가면 순식간에 돈을 버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겠는가. 이런 전관예우 비리자들은 형벌 중에서도 가장 큰 처벌을 내려야 문제가 해결된다.

— 본인에게 삶의 원칙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 남들이 내 이름을 부를 때 기쁨이 되게 살자는 것이다. 되돌아보면 내가 꼭 남들에게 기쁨이 되게 살았던 것은 아니다. 실수한 게 많았다. 또 다른 원칙이 있다면 깨끗하게 살자는 것이다. 몸도 마음도 깨끗하게 살자는 것인데, 그 점에서 저의 어머니와 친지들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국회의원 시절 내가 깨끗하게 살 수 있도록 도와줬기 때문이다.

(취재지원 이은도 김연수 인턴기자)

keunyoung@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