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로 신분 세탁해 조종사 된 남자 이야기…김한결 감독 신작
(서울=연합뉴스) 이영재 기자 = 남자가 며칠이라도 여자로 살아보고, 반대로 여자도 남자의 삶을 경험해볼 수 있다면 어떨까.
부질없는 상상 같지만, 이성(異性)으로 한 번쯤 살아볼 수 있다면 남자는 여자를, 여자는 남자를 좀 더 이해하게 되면서 남녀 간 갈등도 크게 완화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김한결 감독의 신작 영화 ‘파일럿’은 자기밖에 모르는 철없는 남자가 삶의 막다른 골목에서 벗어나려고 여자로 변신해 새 출발을 시도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코미디다.
주인공 정우(조정석 분)는 공군사관학교 수석 졸업의 경력을 자랑하는 여객기 조종사로, 뛰어난 비행 실력뿐 아니라 잘생긴 외모로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인기를 끄는 유명 인사다.
세상 부러울 게 없던 정우는 회사 술자리에서 여성 승무원에게 모욕감을 주는 실언을 하는 바람에 직장을 잃고, 이 사실이 SNS에도 공개되면서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진다.
업계에서 블랙리스트에 올라 재취업이 불가능해진 정우는 한에어라는 저비용항공사에서 여성 조종사를 뽑는 사실을 알게 되고, 여동생 정미(한선화)로 신분 세탁을 하기로 한다. 미용 전문 유튜버인 정미의 도움으로 그럴듯하게 여장(女裝)도 해 완전히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한에어에 조종사로 취업한 정우는 과거엔 안중에도 없던 공사 후배 현석(신승호)의 추근거림에 당혹스러워하고, 여성 조종사인 동료 슬기(이주명)와 깊은 대화도 나누게 된다.
정우가 여자 행세를 하면서 빚어지는 소동이 웃음을 불러일으킨다. 정우의 여장은 꽤 완성도가 높지만, 이따금 자기도 모르게 남성성을 드러낼 때 웃음이 터져 나온다.
남자가 하루아침에 여자로 신분 세탁을 거쳐 취업에 성공하고 버젓이 직장 생활을 한다는 비현실적인 설정을 토대로 한 ‘파일럿’은 극 중 사건들도 개연성 같은 건 과감하게 무시한 듯한 느낌이다.
이런 식의 이야기 전개가 관객에게 거부감을 줄 수도 있겠지만, 웃으면서 즐기는 게 주목적인 여름철 ‘팝콘 무비’라는 점을 고려하면 그 정도는 받아들일 만해 보인다.
영화는 정우가 여자로서 직장 생활의 어려움에 맞닥뜨리는 모습을 그리면서 아직도 한국 사회에 남아 있는 성차별의 문제를 건드리기도 하지만, 진지하고 무거운 주제에 빠지지는 않고 경쾌한 분위기를 끝까지 이어간다.
정우는 여성 동료를 이해하는 걸 넘어 자기 삶을 돌아보게 되고, 가족에 대한 사랑에도 눈을 뜬다. 그렇게 이 영화는 따뜻한 가족영화의 성격도 띠게 된다.
‘건축학개론'(2012)부터 천만 영화의 문턱까지 간 ‘엑시트'(2019)에 이르기까지 개성적인 코믹 연기를 선보인 조정석은 이번에도 관객에게 웃음을 선사하는 데 남다른 능력을 갖췄다는 걸 보여준다.
한선화, 이주명, 신승호는 각각 정미, 슬기, 현석을 개성이 뚜렷한 캐릭터로 그려내면서 조정석과 보기 좋은 앙상블을 이룬다.
‘파일럿’은 김 감독이 데뷔작인 로맨틱 코미디 ‘가장 보통의 연애'(2019) 이후 5년 만에 내놓은 신작이다.
김 감독은 ‘파일럿’에 대해 “늘 자신을 위한 선택만 해왔던 사람이 특별한 경험 이후 비로소 자신과 가족을 돌아보게 되는 과정을 그린 이야기”라고 소개했다.
31일 개봉. 110분. 12세 관람가.
ljglory@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