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렁 같은 사랑에 빠져버렸네…박규리 시집 ‘사무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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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김용래 기자 = “텅 빈 우주에 홀로 있는 것만 같은 슬픔이 뼈에 사무쳤다 (중략) 달 없는 한밤 흔들리는 자작나무 기둥에 기대어 서면 법당 뒤로 들려오는 노루 울음소리가 깊고 길었다” (박규리 시 ‘사무치다’에서)

‘사무치다’는 첫 시집 ‘이 환장할 봄날에'(창비·2004)를 펴낸 이후 20년간 안거(安居)에 들었던 박규리 시인이 두 번째로 펴낸 시집이다.

수록된 시편들의 바닥에는 “텅 빈 우주에 홀로 있는 것만 같은” 고독과 슬픔과 허기가 도도히 흐른다.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려 있어서 그저 꿈만 같기도 하다.

“내 쓸쓸한 외로움과 가난한 허기가 / 저 나무도, 바람도, 당신도 만든 거라고 / 이 환장할 그리움도 치성한 슬픔도 / 다 내 한마음이 꿈결처럼 만든 거라고”(시 ‘정말일까’에서)

시인은 내 안은 물론, 내 마음 바깥쪽 세상 도처에 웅크리고 있는 고통받는 존재들을 연민으로 끌어안는다.

그리고는 ‘수렁’ 일 줄 알면서도 끝내 ‘사랑’하고 만다.

절집에서 공양주로 지내고 또 오랜 시간을 선(禪) 공부로 마음을 다스렸다지만, 수렁 같은 사랑엔 오랜 공력을 쌓은 선승 같은 시인도 속수무책이다.

“끝내 너를 그냥 보낼 줄 뻔히 알면서도 / 이 수렁 같은 사랑에 다시 빠진다 / 어쩌랴 / 어쩌랴”(시 ‘수렁’ 전문)

시인은 1995년 신경림·정희성 시인의 추천으로 ‘민족예술’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의 마지막에는 지난 5월 세상을 뜬 스승 신경림 시인을 기리는 조시가 자리했다.

“세상 가장 낮은 진창마다 / 뻘투성이 맨발로 함께 빠지다 / 세상 배고픈 흙바람 속을 / 꽹과리 두드리며 함께 울부짖다가 (중략) 가시네 / 바보처럼 성자처럼 / 다 버리고 다 용서하고 모두 품어 안고 / 걸음마다 화염의 모래밭 큰물로 적시면서”(시 ‘낙타에 부쳐 – 신경림 선생님의 서거를 애도하며’에서)

과작(寡作)인 시인이 앞으로는 좀 더 많은 시로 독자들을 만났으면 하는 바람을 갖게 만드는 시집이다.

나남. 10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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