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디아스포라교회 정진우 목사 “고용허가제를 노동허가제로 바꿔야”
필리핀 민주화 지원…”국제 기독 단체 도움으로 韓민주화, 빚 갚아야”
(서울=연합뉴스) 이세원 기자 = “제가 ‘너무 일만 하지 말고 천천히 쉬면서 하세요’라고 예문을 들려줬더니 ‘한국에서 20년을 일했는데 이런 말을 처음 들었다’며 주르륵 눈물을 흘렸습니다.”
2020년 서울디아스포라교회를 설립해 필리핀 출신 노동자 등을 상대로 목회 활동을 하는 정진우(67) 담임목사는 이주민이 처한 노동 환경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화를 이렇게 소개했다.
교회 창립 4주년을 계기로 지난 19일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 응한 정 목사는 이주 노동자들이 한국어를 배울 기회조차 거의 없는 것이 현실이라고 전했다.
어느 날 ‘한국말을 배우지 않는 너에게도 문제가 있다’는 취지로 한국에서 10년 넘게 지낸 한 이주 노동자를 나무랐다가 답변을 듣고 크게 반성했다고 한다.
“목사님, 우리는 (봉제 작업 용어인) ‘앞판·뒤판’, ‘이 ××야’, ‘빨리빨리 해’ 이런 말은 다 알아들어요. 그런데 다른 말은 어려워요.”
1970년대 후반∼1980년대 초반 대학 생활을 정 목사의 삶에는 민주주의와 인권이라는 화두가 있었다. 그는 1953년 창립돼 민주화·인권·통일 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서울제일교회(서울 중구 소재)의 제5대 담임목사(2007∼2015년)를 지내기도 했다.
기존의 교회에 한계가 있다는 인식이 서울제일교회를 그만두고 이주민 목회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계기를 제공했다.
정 목사는 “예수가 꿈꾸었던 세상은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평등하고, 권력이 없는 세상이지만 우리는 권력을 만들고 힘을 과시하려는 유혹 앞에서 아무도 자유롭지 못하다”며 당시의 문제의식을 회고했다.
“제가 제일교회에서 목사로서 가장 많은 힘을 가지고 있었지요. 이웃을 위해 많이 사용하기는 하지만 교회에서 돈을 가장 많이 가져다 쓰는 사람인 셈이죠. 교회에서 여러 부정적 현상을 대단히 비판적으로 말하며 살았지만, 그중에서 가장 ‘나쁜 놈’은 바로 나라고 생각했어요.”
정 목사는 사직 후 6개월 정도 필리핀에 다녀온 뒤 “나부터 새로운 방식으로 살아야겠다”며 뜻을 같이하는 이들 10명 정도를 모아 2016년 4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의 회의실을 빌려 예배공동체를 시작했다.
필리핀 이주노동자들이 소식을 듣고 하나둘 예배에 찾아오기 시작했다. 정 목사는 “큰 교회는 프로그램이 잘 되어 있고 거기서 여러 도움도 받을 수 있다”며 그들에게 다른 교회를 권했다.
하지만 이주노동자가 데려오는 지인은 계속 늘었다.
정 목사는 “그분들은 큰 교회에 가면 여러 혜택이나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거기서는 언제나 시혜의 대상이고, 자기 삶의 주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예배공동체에 오는 것이었다”고 시간이 지나면서 깨달은 바를 이야기했다.
필리핀 이주 노동자들이 늘자 결국 서울디아스포라교회를 설립해 정식으로 한국기독교장로회에 가입했다. 2020년 7월 5일 창립 예배를 올렸고 최근 신도들과 조촐하게 4주년을 기념했다.
이 교회에는 남다른 세 가지 원칙과 특별한 미션이 있다.
첫째는 이주민과 선주민이 함께 만드는 공동체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각종 문서나 설교 등은 영어와 한국어를 함께 사용한다. 교회 구성원은 한국인이 20%, 필리핀인이 80%를 차지한다.
두 번째로는 교권 없는 평등한 공동체를 지향한다. 장로, 집사, 권사 등으로 구성된 기성 교회의 시스템을 따르지 않는다. 목사도 한 명의 구성원으로 참여하며 다수결로 의사 결정을 할 때는 일반 신도와 마찬가지로 1표를 행사한다.
교회 예산의 50%를 외부의 이웃을 위해 쓴다는 것이 세 번째 원칙이다. 일반적인 교회보다 매우 높은 비율이다.
이주민의 인권과 삶의 질 개선, 필리핀의 민주적 발전을 위한 협력을 교회의 사명으로 삼는다. 정 목사는 필리핀인권국제연대(ICHRP. International Coalition for Human Rights in the Philippines)를 이끄는 9명의 위원 중 한 명으로 활동한다.
그는 필리핀 민주화라는 미션이 외국 기독교 단체들이 한국의 민주주의와 인권을 되찾기 위해 많은 지원을 했던 것과 관련이 있다고 설명했다.
“국제적 기독교 네트워크가 우리 사회가 민주화되는 데 많은 도움을 줬지요. 그 빚을 갚아야 한다는 부채 의식이 있어요.”
필리핀은 1986년 이른바 ‘피플 파워’ 혁명으로 독재자인 페르디난드 마르코스(1917∼1989) 정권을 무너뜨리면서 아시아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국가로 꼽혔지만 정치·경제적 과제를 해결하지 못하면서 악순환에 빠졌다.
포퓰리즘을 업고 2016년 출범한 로드리고 두테르테 정권이 마약과의 전쟁 등 부패 소탕을 명분으로 많은 이들을 정식 재판 없이 사살하고 정치적 반대파를 탄압했다.
2022년에는 36년 전 실각한 독재자의 아들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2세(봉봉 마르코스)가 대통령으로, 두테르테의 딸 세라 두테르테가 부통령으로 취임해 민주주의가 후퇴했다는 우려를 사고 있다.
정 목사는 이주 노동자들이 처한 열악한 노동·생활 환경에 우려와 안타까움을 표명했다.
“기본적으로 하루에 10∼12시간 정도 일하고 토요일도 반 정도는 못 쉽니다. 설과 추석을 제외하면 공휴일도 없고 통상 일요일만 쉽니다. 사람마다 다르지만, 한 달에 180만∼200만원 정도를 받아 절반을 고국으로 송금하고 나머지로 생활하죠. 서울을 기준으로 보면 99% 정도는 반지하에서 월세로 삽니다.”
일각에서 이주노동자들이 내국인의 일자리를 잠식하거나 범죄를 저지른다며 혐오감을 조장한다. 정 목사는 이들이 한국 사회 노동력의 일익을 맡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가장 더럽고, 위험하고, 힘든 소위 ‘3D 업종’의 일자리 약 40만개를 이주노동자들이 맡고 있습니다. 한국 사람은 그곳에서 일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노동력이 부족한 현실에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노동력 수입을 피할 수 없습니다.”
법무부의 출입국 통계를 보면 ‘불법체류외국인'(등록+단기+거소)은 2023년 기준 42만3천675명인데 이들이 한국인이 기피하는 일터에 노동력을 공급하고 있으며 이런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는 취지다.
실제로 서울디아스포라교회에 오는 필리핀 이주노동자도 대부분 정부가 허락한 체류 기간을 넘긴 상태다. 이들은 봉제공장이나 재활용품 분리수거 작업장 등에서 일한다.
고용주가 승인하지 않으면 직장을 옮기기 어려운 제약이 이들의 어려움을 가중한다.
정 목사는 “1991년에 왔지만, 여전히 ‘미등록 노동자’인 교인도 있다”며 “고용허가제(EPS. Employment Permit System)를 노동허가제(WPS. Work Permit System)로 바꿔 이주 노동자들이 직장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인도주의적 관점에서라도 미등록 노동자들이 일정 기간 한국에 체류하면 사회 통합 능력(예: 한국어 시험)을 고려해 최소한의 체류권을 부여하고 안정적으로 일하며 삶의 질을 개선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정 목사는 의료, 교육, 법률 등 이주 노동자들이 한국에서 겪는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백방으로 뛴다. 가장 큰 문제는 의료다. 의료보험이 없기 때문에 중병에 걸리거나 다치면 큰 곤란을 겪는다.
정 목사는 이제 이민 정책과 이주 노동자를 바라보는 한국인의 시각에 전환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제 우리가 이주 노동자와 함께 어떻게 인간다운 사회를 만들어 갈 것인지, 만약 일자리 갈등이 있다면 어떻게 합리적으로 조정할 것인지 대안을 모색해야 할 때입니다. 혐오나 배제가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절대 아닙니다.”
sewonlee@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