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0-27 10:04
(서울=연합뉴스) 송광호 기자 = 수돗물을 틀면 녹물이 나오고 바퀴벌레가 기어 다니는 사옥에서 벗어나 근사한 빌라에 안착했을 때, 최지수 씨는 행복했다. 매달 30여만원이 들어가는 월세보다는 대출받을 수 있는 전세가 훨씬 나아 보였다.
전셋집은 회사와 가까운 천안시 서북구 두정동에 있었다. 건물 꼭대기 층이어서 전망이 좋았고, 전면 거실과 방이 발코니를 향해있는 구조였다. 마음에 꼭 들었지만, 건물주가 제2금융권에서 받은 근저당 대출 33억원이 다소 꺼림칙했다.
부동산중개소 소장은 한국공인중개사협회가 발행하는 1억원짜리 공제증서를 건네주며 주변 빌라들이 죄다 60~70%는 대출을 끼고 있다고 얘기했다. 최씨는 “내 보증금은 1억원을 넘지 않으니 괜찮겠지”라고 생각하며 청년버팀목전세자금대출 4천640만원을 받았다. 대출 금리는 2%를 넘지 않았다.
2020년 여름. 당시 부동산가격은 최고점을 찍은 후 내리막으로 치닫기 직전이었다. 그리고 최씨는 그때까지만 해도 월세 30만원을 아끼려다가 청춘을 저당 잡힐 줄 꿈에도 몰랐다.
최지수 씨가 쓴 ‘전세지옥'(세종)은 1991년생 청년이 전세 사기를 당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다. 취업난과 주거난이 맞물린 이야기 속에 청춘의 꿈이 어떻게 허망하게 허물어지는지 책은 보여준다.
저자는 대학 졸업 후 천안에 있는 한 회사에 취업했다. 봉급이 괜찮은 편이었지만 집과 멀었고, 직장 내 괴롭힘이 만연한 곳이었다. 그는 조종사의 꿈을 이루고자 잠시 거쳐 가는 곳이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동기들이 차를 살 때도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그래도 녹물이 나오고 바퀴벌레가 다니는 사옥을 견디긴 어려웠다. 그는 대출받아 전셋집을 마련했다. 직장 일이 힘들었지만, 퇴근해 안락한 방에 누워있으면 기분이 다시 좋아졌다.
그로부터 1년 후 최씨는 지긋지긋한 회사생활을 접을 수 있게 됐다. 해외 취업 프로그램에 합격했기 때문이었다. 헝가리에서 돈을 좀 더 벌면 조종사에 도전할 수 있다고 그는 낙관했다. 그러나 불행은 소리 없이 다가오고 있었다.
2021년 7월. 그는 출입문에 붙은 경매통지서를 확인했다. 백방으로 알아봤지만, 돈을 돌려받을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그는 자포자기한 채 헝가리로 취업했으나 그쪽 사정도 좋지 않았다. 우크라이나-러시아전쟁으로 물가가 오를 대로 오른 상태였기 때문이다. 처우가 좋지 않아 국내에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전세 만기가 도래하자 그는 모아둔 돈과 카드론을 받아 대출을 갚았다. 이자가 10%를 넘는 카드 빚을 갚고자 그는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서른이 넘었지만, 모아둔 돈은 없고, 빚은 쌓여갔으며 꿈은 멀어져갔다. 연로한 부모님에게 손을 빌릴 염치도 없었다. 그는 원양어선을 타기로 결심했다. 원점부터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 목돈을 모으려면 현실적으로 그 방법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조종사를 꿈이 아닌 현실로 만들겠다고 결심했을 때부터 자동차, 연애, 결혼을 포기했다. 하지만 전세 사기를 당한 지금도 인간의 존엄성을 포기할지언정 꿈을 포기할 생각은 없다.”
책은 저자가 전세 사기를 당하고, 겪으며 극복해야 했던 820일간의 이야기를 그렸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과 똑같은 피해를 보지 않도록 본인이 했던 실수를 구체적으로 담았다고 저자는 설명했다.
260쪽.
buff27@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