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환 감독 장편 데뷔작…장황한 대사 없이도 복잡한 내면 표현
(서울=연합뉴스) 이영재 기자 = 찰나의 움직임 하나로 승부가 갈리는 검도의 세계에선 정신을 조금이라도 흐트러뜨리는 상념을 없애는 게 중요하다고 한다.
검도 수련자들이 운동을 마치고 정좌한 채 묵상하는 것도 마음을 닦아 무념무상의 경지에 이르기 위한 것이다.
김성환 감독이 연출한 ‘만분의 일초’는 검도 실력이 꽤 뛰어나긴 해도 마음속 응어리 탓에 앞으로 한 단계 나아가지 못하는 청년의 성장기를 그린 영화다.
검도 선수 재우(주종혁 분)가 국가대표 최종 선발을 위한 훈련에 참여하려고 깊은 산속에 있는 도장에 도착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곳에 모인 선수들은 3주 동안 합숙하면서 운동을 함께하고, 토너먼트식 경기로 우열을 가린다. 서바이벌 게임처럼 탈락자들은 하나둘 퇴소하고, 마지막에 다섯 명만 남게 된다.
참가자 가운데 실력이 가장 뛰어난 태수(문진승)가 자꾸만 재우의 눈에 들어온다. 카메라는 태수의 뒷모습과 옆모습을 끊임없이 비추면서 재우가 몰래 그를 지켜보고 있음을 드러낸다.
재우에겐 태수와 결부된 가슴 아픈 가족사가 있다. 태수를 용서하지 못하는 재우는 상념에 사로잡혀 검도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퇴소할 위기에 몰린다.
이 영화에서 주목할 만한 건 재우의 내적 갈등을 보여주는 데 장황한 대사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관객은 검도의 힘찬 동작과 기합 소리, 이글거리는 눈빛 같은 것으로 재우의 내면을 느낄 수 있다. 재우가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장면에서도 꽉 쥔 주먹 하나로 그의 분노가 표현된다.
재우가 마음속 응어리를 풀어가는 과정이 그렇게 치밀하지는 않아 보인다.
그러나 ‘만분의 일초’가 내적 갈등의 완전한 해소보다는 제목이 암시하듯 극히 짧은 순간이라도 응어리에서 벗어날 가능성을 그렸다고 본다면, 재우의 변화를 공감하는 데 큰 무리는 없을 것 같다.
국내에서 검도를 본격적으로 다룬 영화는 ‘만분의 일초’가 처음이라는 게 제작진의 설명이다. 이 작품은 인물의 내적 갈등을 검도와 절묘하게 결합함으로써 검도도 영화의 좋은 소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줬다.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 권모술수 변호사 권민우 역을 맡았던 배우 주종혁은 이 영화에서 마음속 응어리에 사로잡힌 재우의 내면을 강렬한 눈빛으로 표현한다.
태수를 연기한 문진승은 어찌 보면 악역을 맡았지만, 시종 차분하고 절제된 연기를 펼침으로써 관객이 자연스럽게 재우와 태수의 갈등보다는 재우의 내적 갈등에 집중하도록 이끈다.
주종혁과 문진승은 촬영을 앞두고 수개월간 검도의 기본기를 익혔다고 한다. ‘오징어게임’의 정성호 무술감독이 이 작품에서도 액션 지도를 맡았다.
‘첫눈'(2012), ‘야누스'(2014), ‘배팅게이지'(2016), ‘얼라이브'(2016) 등 단편영화를 연출해온 김 감독은 ‘만분의 일초’로 장편에 데뷔했다.
이 영화는 제27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코리안 판타스틱 작품상’과 ‘왓챠가 주목한 장편상’을 받아 2관왕을 했고, 제8회 런던아시아영화제에서는 최우수 작품상을 받았다.
15일 개봉. 100분. 12세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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