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오보람 기자 = 우리는 간혹 부모님과 함께할 시간이 무한정 남아 있을 거라는 착각을 하곤 한다. 특히 고향을 떠나 객지에 사는 자식들은 ‘나중에’, ‘다음에’를 다짐하다가 어느새 늙어 있는 부모님을 발견하기도 한다.
김민주 감독이 연출한 영화 ‘교토에서 온 편지’의 주인공 혜영(한선화 분)도 바쁜 일상을 보내느라 몇 년 만에 부산에 있는 집을 찾는다. 다시 만난 엄마 화자(차미경)는 백발이 성성하고 얼굴에는 주름이 가득해 노인처럼 변해 있다. 딸이 좋아하던 게 단감인지 홍시인지 같은 사소한 일도 깜빡깜빡한다.
한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화자는 어릴 적 아버지와 함께 일본을 떠나 부산 영도로 왔다. 생이별한 엄마와는 편지를 주고받으며 지내다가 어느 순간부터 소식이 끊겼다. 남편 없이 훌륭하게 키워낸 세 자매가 화자의 유일한 위안거리다. 티 없이 자란 세 자매를 보면, 화자가 정작 자신은 받아보지 못한 엄마의 사랑을 자기 자식들에게는 얼마나 베풀었을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자매들은 고향을 벗어나고만 싶다. ‘K-장녀’ 혜진(한채아)은 가족을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부산에 머물러왔지만 이젠 부담을 내려놓고 싶어 한다. 둘째 혜영은 조만간 서울로 돌아갈 참이고, 고등학생인 막내 혜주(송지현)는 댄서가 되기 위해 아예 서울로 이사 갈 생각을 한다.
화자가 갑작스레 치매 진단을 받으면서 세 자매의 이런 계획은 보류된다. 엄마는 언제까지나 건강한 모습으로 곁에 있을 거라 생각했을 세 사람은 충격에 빠진다. 엄마와 가장 시간을 보내지 못한 둘째 혜영의 마음은 참담하기만 하다.
당사자인 화자의 마음에도 파문이 인다. 오랜 세월 잊고 지낸 엄마 생각이 자꾸만 난다. 그는 결국 자식들에게 엄마를 만나러 교토에 가고 싶다고 말한다. 세 자매는 엄마에게 엄마를 선물할 수 있을까.
이 영화는 김 감독이 어머니의 실제 사연을 모티프로 각본을 쓰고 연출한 작품이다. 김 감독의 어머니 역시 화자처럼 일본을 떠나 부산에 오는 바람에 친모와 이별했다고 한다. 김 감독은 당초 어머니와 외할머니를 주인공으로 한 다큐멘터리를 만들려다 세 자매 이야기를 섞어 따뜻한 극영화로 풀어냈다.
그 덕에 자매애와 가족애, 지방 도시에 사는 청춘들의 고민 등으로 주제가 확장된다. 티격태격하다가도 금방 화해하는 세 자매와 이들이 서울을 선망하는 모습은 낯설지 않다. 한선화, 차미경, 한채아 등 주연 배우들이 모두 부산 출신인 만큼 자연스러운 사투리와 연기 앙상블도 볼 수 있다.
영화는 엄마에게도 엄마가 있고 청춘이 있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일깨우며 관객들의 마음을 아프게 찌른다. 기회가 있을 때 효도하라는 다소 뻔한 이야기일지 모르겠지만, 신파 없이 담담하게 이들을 관찰하는 연출 덕분에 김 감독의 당부는 더 깊이 있는 울림을 준다.
12월 6일 개봉. 102분. 12세 이상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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