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란군에 맞선 군인과 가족의 고통…’서울의 봄’ 뒷이야기들

이태신 모델 장태완 장군, 부친에 외아들까지 잃어

특전사령관 정병주 장군, 비서실장 김오랑 소령 가족도 비운의 죽음

극장 상영 중인 ‘서울의 봄’
(서울=연합뉴스) 강민지 기자 = 지난 26일 서울의 한 영화관에 내걸린 ‘서울의 봄’. 2023.11.26. mjkang@yna.co.kr

(서울=연합뉴스) 이영재 기자 = 흥행 가도를 달리는 김성수 감독의 신작 ‘서울의 봄’은 1979년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주도한 12·12 군사반란을 픽션으로 재구성한 작품이다.

관객들은 이 영화가 재밌다고 호평하면서도 한편으론 답답한 마음을 토로한다.

여기엔 불법적인 군사반란 세력이 승리하는 걸 지켜보는 데서 오는 분노가 깔려 있다. 관객들은 SNS에서 자신의 분노를 보여주는 ‘심박수 챌린지’를 벌이기도 한다.

이 영화는 12·12 당일 오후부터 이튿날 새벽까지 긴박했던 9시간을 다루고 있다. 그 이후에 실제로 벌어진 일들도 마음을 무겁게 하기는 마찬가지다.

12·12 당시 수도경비사령관이었던 장태완 장군의 수기와 인터뷰 등 자료를 토대로 반란군에 맞선 군인들이 12·12 이후 어떤 고초를 겪었는지, 영화 속 이야기는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등을 정리해봤다.

장태완 전 수도경비사령관
[연합뉴스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 반란군에 맞선 장태완 장군의 고초

‘서울의 봄’은 반란군을 이끄는 보안사령관 전두광(황정민 분)과 그에 맞선 수도경비사령관 이태신(정우성)을 축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전두광은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 이태신은 장태완 장군을 모델로 했다.

1979년 11월 수도경비사령관에 부임한 장 장군은 12·12 당시 반란군 진압에 실패하고 보안사령부 서빙고 분실로 끌려가 가혹한 조사를 받았다. 영화 말미에도 이를 보여주는 장면이 잠깐 나온다.

장 장군은 1980년 3월 이곳에서 풀려났다. 장 장군이 2010년 월간조선과 한 인터뷰를 보면 그가 서빙고 분실에 있을 때 전두환 사령관이 찾아와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손을 덥석 잡고 “장 선배, 그동안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습니까”라며 말을 건넸다고 한다.

강제 전역을 당한 장 장군은 서빙고 분실에서 나와서도 6개월 동안 사실상 가택연금 상태였다. 그의 고초를 지켜봐야 했던 부친은 곡기를 끓고 세상을 떠났다.

불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장 장군이 가택연금인 중에도 열심히 공부해 서울대 자연대에 입학한 외아들이 1982년 1월 행방불명이 됐고, 한 달 뒤 고향과 가까운 낙동강 변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장 장군은 12·12 군사반란의 진실을 밝혀내는 데 남은 삶을 바쳤다. 사건의 실상을 기록한 ’12·12 쿠데타와 나’라는 제목의 책을 펴냈고, 1993년 7월엔 전두환을 포함한 34명을 반란과 내란 등의 혐의로 검찰에 고소했다.

제16대 국회의원도 지낸 장 장군은 2010년 7월 세상을 떠났다. 2012년 1월엔 그의 부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영화에선 배우 전수지가 이태신의 부인을 연기했다.

2013년 서울현충원에서 열린 ‘참군인 김오랑 추모제’
[연합뉴스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 특전사령관도 쓸쓸한 죽음…총격전에 숨진 비서실장 가족의 비운

‘서울의 봄’에서 반란군에 맞선 군인으로는 이태신 외에도 특전사령관 공수혁(정만식), 특전사령관 비서실장 오진호(정해인), 헌병감 김준엽(김성균) 등을 꼽을 수 있다.

공수혁은 12·12 당시 특전사령관이었던 정병주 장군, 오진호는 정 장군의 비서실장 김오랑 소령을 모델로 했다. 김준엽은 당시 육군본부 헌병감이었던 김진기 장군이 모델이다.

정 장군은 12·12 때 반란군을 진압하려고 인천의 9공수여단을 출동시켰지만, 이 부대는 윤성민 육군참모차장의 지시로 회군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지시로 3공수여단이 정 장군 체포 작전에 나섰고, 이 과정에서 벌어진 총격전으로 그는 부상했다.

12·12의 진실을 밝히는 활동을 하던 정 장군은 1989년 경기도 의정부의 야산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이에 대해 의문사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김오랑 소령은 12·12 당시 정 장군을 체포하려고 들이닥쳐 총기를 난사하는 3공수여단 병력에 권총을 쏘며 저항하다가 숨졌다.

이 사건의 충격으로 김 소령의 모친이 세상을 떠났다. 그의 부인도 충격을 받아 실명했고, 1993년 실족사했다. 김 소령은 1990년 중령으로 추서됐다.

김진기 장군은 12·12 직후 보안사에 끌려가 고초를 겪고 이듬해 강제 전역을 당했다. 그는 2006년 12월 별세했다.

‘서울의 봄’의 한 장면
[플러스엠엔터테인먼트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 12·12 당일 만찬과 한강 다리 통제는 사실…세종로 일촉즉발 대치는 허구

‘서울의 봄’은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했지만, 관객에게 재미를 주기 위해 영화적 상상력을 발휘했다. 이 때문에 사실인 것과 사실이 아닌 게 섞여 있다.

이 영화의 앞부분에서 전두광이 이태신과 공수혁 등의 발을 묶으려고 만찬에 초대해놓고 본인은 나타나지 않은 장면은 상당 부분 사실과 맞아떨어진다.

12·12 당일 오후 전두환 사령관은 장태완 장군, 정병주 장군, 김진기 장군 등을 연희동 만찬에 초대했다.

만찬장에 도착해 전 사령관을 기다리던 이들은 정승화 당시 계엄사령관이 있던 육군참모총장 공관에서 총격전이 벌어졌다는 보고를 받고 즉시 부대로 복귀해 대응에 나섰다.

진압군이 한강 다리에 바리케이드를 쳐 민간인 차량으로 꽉 막히게 함으로써 반란군의 이동을 막은 것도 사실에 부합한다.

당시 병력으로 진압군을 막을 수 없었던 장태완 장군은 임시방편으로 한강 다리 통제 지시를 내렸다. 장 장군은 수기에서 영문도 모른 채 한강 다리에 발이 묶였던 민간인들에겐 평생 속죄할 것이라고 털어놓기도 했다.

영화에서 관객의 마음을 답답하게 하는 데 한몫하는 사람이 국방부 장관 오국상(김의성)이다. 12·12 당시 노재현 국방부 장관도 반란군 진압을 진두지휘하기는커녕 총격 소리에 놀라 한미연합사령부 등을 전전하며 피신했다.

전세가 반란군에 이미 기울었을 때 겨우 장 장군과 전화 연락이 닿은 노 장관의 첫마디가 “장태완, 넌 왜 자꾸 싸우려고만 하나?”였다고 한다.

사실과는 다른 장면도 많다. 클라이맥스라고 할 수 있는 반란군과 진압군의 세종로 대치가 대표적이다. 서울 한복판에서 대규모 무력 충돌이 벌어질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장면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반란군이 치밀한 계획에 따라 기습적으로 권력을 접수한 탓에 진압군은 이렇다 할 저항을 하지 못했다.

영화에선 이태신이 직접 부대를 이끌고 세종로로 출동해 전두광과 맞닥뜨리지만, 장태완 장군은 부대에서 상황 보고를 받으며 지시를 내리거나 전화로 다른 부대에 도움을 요청했고, 부대를 벗어나진 않았다.

장 장군은 최후 결전을 염두에 두고 병력 집결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실제로 행정·기술 병력 100여명, 전차 4대, 화포 몇 문 등이 집결했다고 한다. 그러나 장 장군은 모든 상황을 종료하라는 노 장관의 지시에 저항을 중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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