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영웅·로맨티스트 두 얼굴 연기…대규모 전쟁신 스펙터클 선사
(서울=연합뉴스) 오보람 기자 = 영웅이냐, 전쟁광이냐.
1804년 스스로 프랑스 황제가 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도 평가가 갈리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가 프랑스 혁명 이후 불안해진 정세를 안정시키고 사회·정치제도를 근대화했다는 데에는 큰 이견이 없다.
변두리 섬에서 이탈리아계 프랑스인으로 태어나 능력 하나만으로 황제 자리까지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기 때문에 그를 위인으로 떠받드는 시각도 있다.
그만큼 나폴레옹은 역사상 최고 군사 전략가 중 한 명으로 꼽힌다. 그를 견제하기 위해 영국,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등 유럽 국가들은 서로 동맹을 맺고 나폴레옹의 전술과 군사 시스템을 모방하기 바빴다.
흥미로운 점은 이런 그에게도 오랫동안 정복하지 못한 여인이 있다는 것이다. 파리에서 손꼽혔던 미인이자 아이가 둘 딸린 6살 연상의 여자 조제핀이다. 그는 나폴레옹과 결혼해 후에 황후가 되지만 한동안 나폴레옹에게 마음을 주지 않고 정부를 뒀다.
할리우드의 거장 리들리 스콧 감독은 영화 ‘나폴레옹’을 통해 이런 그의 장대한 일대기를 그린다.
나폴레옹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를 연출하는 건 스콧 감독의 오랜 꿈이었다고 한다. 몇 년 전 ‘아직 만들지 못한 영화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나폴레옹이라고 답한 일화도 전해진다.
“프랑스, 군대, 조제핀”이라는 나폴레옹의 유언처럼 영화는 군대와 나라를 이끄는 리더로서의 나폴레옹과 조제핀을 사랑한 로맨티스트 나폴레옹의 모습이 두 축을 이룬다.
프랑스 혁명 직후 로베스피에르 공포 정치를 지나 프랑스 제1 공화국 수립, 제국의 시작, 왕정복고에 이르는 복잡한 역사도 주요하게 다룬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친구가 되는 외교전, 의리와 배신이 난무하는 정치판도 녹여냈다.
근대 프랑스 중심에 선 인물의 일대기를 다룬 작품이다 보니 러닝타임은 다소 길지만, 지루하게 느껴질 정도는 아니다. 스콧 감독이 계획 중인 감독판은 러닝타임이 무려 4시간 10분에 달한다고 한다.
나폴레옹(호아킨 피닉스 분)이 마리 앙투아네트가 단두대에서 처형당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당시 하급 지휘관에 불과했던 나폴레옹은 당장의 진급을 목표로 했을 뿐 대단한 야망을 품은 남자로 묘사되지는 않는다.
툴롱 전투 승리로 장군이 되고, 한 사교 모임에서 운명의 여인 조제핀(버네사 커피)을 만나게 되면서 비로소 야심이 움튼다.
나폴레옹의 긴 구애 끝에 조제핀은 그와 결혼한다. 그러나 사랑의 무게 중심은 나폴레옹 쪽으로 크게 기울어 있다. 전장에 나간 동안 조제핀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을 나폴레옹의 내레이션으로 듣다 보면 안쓰러운 마음이 들 정도다.
영화는 조제핀을 향한 사랑뿐만 아니라 나폴레옹의 인간적인 모습을 자주 보여준다. 손님들을 앞에 두고도 조제핀과 서로 음식을 던지며 싸우거나, 전투에 나서기 전 잔뜩 긴장해 목소리를 떠는 장면도 나온다.
러닝타임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전투 신을 통해서는 나폴레옹의 영웅적 면모를 비춘다.
카리스마를 내뿜으며 수십만 대군을 진두지휘하는 장면은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
툴롱, 아우스터리츠, 마렝고, 보로디노, 워털루 전투 등은 섬세하면서도 압도적인 스케일로 재현됐다.
나폴레옹이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과 격돌한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는 얼어붙은 호숫가에 대포를 쏴 적들을 수장시키는 지략가의 모습이 엿보인다.
영국·오스트리아 연합군에 맞선 워털루 전투는 나폴레옹의 패배로 끝났지만, 시대극 액션 특유의 스펙터클을 선사한다. 방진을 세운 영국군 주위를 프랑스 기마병들이 뱅뱅 돌고 멀리서는 오스트리아 기마 부대가 몰려오는 모습이 손에 땀을 쥐게 한다.
스콧 감독은 영화가 끝나기 직전 나폴레옹의 전쟁 때문에 숨진 프랑스 군인의 숫자를 열거한다. 나폴레옹이 비범한 인물이라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로 인해 엄청난 수의 생명이 희생됐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었던 듯하다.
스콧 감독은 “나폴레옹의 역사는 곧 현대사의 시작이며 그는 세상을 바꾸고 역사를 다시 쓴 사람”이라면서도 “사람들이 나폴레옹에게 끌리는 이유는 그가 매우 복잡 미묘한 인물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영화에서 나폴레옹의 양면적 얼굴이 효과적으로 드러날 수 있었던 건 호아킨 피닉스라는 뛰어난 배우의 힘이 제대로 작용한 덕이다.
피닉스의 외모는 실제 나폴레옹과 닮은 구석이 거의 없지만, 처음부터 나폴레옹이었던 것 같은 착각이 들 만큼 호연을 펼친다. 눈빛만으로도 군대를 거느린 장군에서부터 나라를 이끄는 황제, 한 여자의 사랑을 갈구하는 남편을 오간다. 프랑스 황제의 대서사시를 피닉스가 다시 썼다고 평가할 만하다.
조제핀 역의 커비 역시 뒤지지 않는 연기를 선보인다. 바람피운 게 발각되고도 단숨에 남편을 쥐락펴락하고, 나중에는 그의 사랑에 목말라하다 쓸쓸히 죽어가는 여인으로 변모한다. ‘미션 임파서블’을 통해 할리우드에서 주목받는 배우로 떠오른 그에게 ‘나폴레옹’은 전환점이 될 것 같다.
오는 6일 개봉. 158분. 15세 이상 관람가.
rambo@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