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거북의 고향 제주…거북, 풍요·안전 가져다 줄거라 믿어
“신화·전설 속 거북 신앙, 해녀 삶 지탱해 주는 힘 원천”
[※ 편집자 주 = 제주에는 섬이라는 지리적 여건으로 생성된 독특한 문화가 많습니다. 그러나 오랜 세월 세대가 바뀌고 과학기술이 발달하면서 제주만의 독특한 문화가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할 수 있지만, 문화와 함께 제주의 정체성마저 사라지는 것은 아닌지 안타깝고 불안합니다. 근대화 과정에서 후진적이고 변방의 문화에 불과하다며 천대받았던 제주문화. 하지만 지금 우리는 그 속에서 피폐해진 정신을 치유하고 환경과 더불어 공존하는 삶의 지혜를 배울 수 있습니다. 제주문화가 재조명받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다시’라는 우리말은 ‘하던 것을 되풀이해서’란 뜻 외에 ‘방법이나 방향을 고쳐서 새로이’ 또는 ‘하다가 그친 것을 계속해서’란 뜻을 담고 있습니다. 다시! 제주문화를 돌아보고 새롭게 계승해 나가야 할 때입니다. 연합뉴스는 이번 기획 연재를 통해 제주문화가 우리 삶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고 계승해 나갈 방법을 고민합니다.]
(제주=연합뉴스) 변지철 기자 = 장수(長壽)와 부귀영화를 상징하는 거북.
바당밭(바다밭)을 삶의 터전으로 삼아 살아가는 제주 사람들에게 거북은 더욱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제주 전역에서 바다거북은 제줏말로 ‘요왕사자’ 또는 ‘요왕할망 말젯똘애기’로 인식된다.
용왕의 신하인 사자(使者) 또는 용왕신의 막내딸아기 정도의 뜻이다.
어떤 의미일까.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과 함께 제주의 역사·문화 속에서 바다거북의 문화적, 자연환경적 의미와 가치, 공존 방법에 대해 2차례에 걸쳐 살펴본다.
◇ 바다거북의 고향 제주
지난 1999년 10월 18일 오전 7시께 제주 서귀포시 중문해수욕장 모래 언덕.
힘겹게 알을 깨고 나온 새끼 바다거북 100여마리가 엉금엉금 기어 바다로 들어가는 모습이 목격됐다.
중문관광단지의 한 호텔 총지배인이던 패리드 슈케어(43)씨가 백사장을 산책하던 중 모래언덕 밑에서 우연히 이를 발견한 것이다.
바다거북은 보통 6∼8월에 모래사장에 알을 낳는다.
지열에 의해 2달가량 지난 뒤 부화하는데 당시 제주에 비가 많이 오면서 온도가 평년보다 낮아 뒤늦게 부화한 것으로 보인다는 전문가 의견이 언론을 통해 보도됐다.
이로부터 3년 뒤 같은 곳에서 바다거북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2002년 6월 20일 오후 1시께 중문해수욕장 백사장 중간 지점에서 길이 120㎝, 폭 80㎝ 크기의 바다거북이 알을 낳고 있었다.
모래를 깊이 파고 들어가 머리와 등껍질 부분만 드러냈던 바다거북은 알을 낳고는 뒷다리로 모래를 덮어 메운 뒤 유유히 바다로 돌아갔다.
발견된 지 30여분 만이었다.
이후에도 2004년과 2007년에 제주에서 바다거북의 산란이 확인된 바 있다.
최근에는 서귀포 섶섬 인근 바닷속에서 푸른바다거북이 유영하는 모습이 수중카메라에 포착되기도 했다.
예부터 제주는 거북의 고향이었다.
‘고려사'(高麗史)에는 고려 문종 7년(1053년) 2월에 탐라국 왕자 수운나(殊雲那)가 고려 정부에 거북 등껍질(龜甲·귀갑)을 비롯해 우황, 쇠뿔, 쇠가죽, 나육, 비자, 해조류 등을 바친 기록이 나온다.
주목할 만한 물품 중 하나가 바로 거북이다.
과거 제주 곳곳에 펼쳐진 해안 모래밭은 바다거북의 주요 산란 장소였던 것으로 보인다.
동아시아 해역을 지나던 거북이들이 제주 연안을 따라 발달한 해안 사구에 알을 낳았고, 탐라국 사람들은 이 바다거북을 잡아 사대관계에 있던 고려 조정에 바쳤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예부터 거북 등껍질은 비녀, 목걸이, 빗 등 여러 장신구의 재료로 쓰이면서 보석만큼이나 매우 귀하게 여겼다고 한다.
장수(長壽)와 부귀영화를 상징하는 만큼 거북을 소유하려는 욕심으로 이어졌다.
전국에서 바치는 진상품 중 제주에서 올라온 거북 등껍질은 으뜸이었다.
하지만 아무 때나 거북을 만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살아있을 때 잡아야 하기 때문에 거북 등껍질을 구하는 일은 몹시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다고 한다.
◇ “두려움과 고마움”…바다거북의 두 얼굴
거북은 오래도록 살고 죽지 않는다는 열 가지를 일컫는 ‘십장생'(十長生) 중 하나로 꼽히는 영물(靈物)이다.
우리나라 민속놀이인 거북놀이는 경기도 이천과 충북 음성 등에서 행해져 거북을 통해 무병장수와 평안, 풍년농사를 기원했다.
널리 알려진 판소리계 소설 ‘별주부전’에서 거북은 용왕의 충성스러운 신하로 등장한다.
‘섬’이라는 폐쇄된 자연환경 속에 독특한 문화가 발달한 제주에서 거북은 어떤 존재일까.
제주 해녀공동체와 바다거북 문화 이야기를 다룬 인문서적 ‘곱게 갑서, 다시 오지 맙서'(2021, 한그루)에서 저자인 강대훈은 “제주 본풀이(제주신화, 신(神)들의 내력을 풀어낸다는 뜻)에서 거북은 두 얼굴의 영물로 그려진다”고 말한다.
사람에게 죽음과 질병을 가져다주는 무서운 얼굴, 그리고 사람을 돕고 은혜를 갚는 고마운 얼굴의 거북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제주신화 중 동해용왕의 막내딸에 대한 ‘동이용궁할망본풀이’가 있다.
‘동이용궁할망’은 아기를 아프게 하고 저승으로 데려가는 무서운 할망(제주에서는 ‘할망’을 단순히 ‘할머니’가 아닌 ‘여신’의 의미로도 사용한다)이다.
아기를 점지해 출산을 돕고 아이가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하는 ‘삼승할망’과 정반대의 신이다.
제주 사람들은 바다거북을 바로 용왕신의 막내딸(동이용궁할망)로 여겨 자신의 아기 또는 손자들을 찾지 말아달라고 신(동이용궁할망)께 기도한다.
반면, 제주신화 또는 전설에는 인간을 돕는 고마운 바다거북도 등장한다.
제주 무속의 기원신화에 해당하는 ‘초공본풀이’에서 바다거북은 심방(무당을 뜻하는 제주어)의 조상 격인 무조신(巫祖神) 삼시왕의 어머니를 돕는 영험한 동물로 묘사된다.
또 웅덩이에 빠진 바다거북을 꺼내 바다로 돌려보낸 해녀에게 거북의 어미가 은혜를 갚는 이야기 등이 전해내려온다.
신화와 전설을 통해 형성된 믿음은 실제 거북을 만났을 때 행동으로 드러난다.
제주 사람들은 살아있는 거북이가 해안에 올라오면, 거북이에게 막걸리와 돼지고기를 대접해 지극 정성으로 되돌려 보냈다.
용왕의 막내딸인 거북이가 집으로 돌아가 인간으로부터 대접을 잘 받았다고 여겨야 용왕이 마을 자손들의 물질작업과 조업 안전, 마을의 풍요를 가져다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한편, 죽은 거북이가 해안가로 떠밀려 오면 흰 천으로 곱게 싸서 제를 지내 바다로 다시 돌려보냈다.
거북의 죽음은 마을에 상서롭지 않은 징조라고 여겼다. 죽은 거북을 보는 것 자체가 바다에서 생업을 해야 하는 해녀들의 마음을 어둡게 했다.
「바다거북에게는 육지에서의 죽음이 나쁜 죽음이다. … (중략) … 그래서 성산읍에서는 거북을 보낼 때 꼭 ‘좋은 데로 가시라’고 기도를 해준다. 가령 고성리 김덕순 해녀는 바다거북을 띄울 때 “저 넓은 세상, 좋은 데 가서 우리 지역에 다시 올라오지 말앙(말고)”이라고 말한다. 또 온평리 고인순 해녀는 죽은 거북을 보내면서 “곱게 갑서(가세요), 돌아오지 맙서(마세요)”라고 빌어준다고 했다.」(‘곱게 갑서, 다시 오지 맙서’, 한그루 155쪽)
이러한 의식 뒤에 해녀들은 바다거북이 환생할 것이라 믿는다.
용왕의 막내딸인 신(神)이 죽을 리 없으며 반드시 바다로 돌아가 환생할 것임을 믿어의심치 않는다.
인류학을 연구하는 ‘곱게 갑서, 다시 오지 맙서’의 저자 강대훈은 “해녀들의 무속적 실천에는 소박한 생업의 자리에서 현재의 시련을 긍정하고 오늘보다 조금이나마 나은 내일을 희망하게 하는 원초적 낙관주의가 존재한다”며 “(해녀들의) 기도는 조상에 대한 기도이며 자손들의 안녕에 대한 기원으로서 제주 조상신앙의 근원적 꿈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그는 “전설과 신화 속 거북은 해녀들의 생활세계로 내려와 산다. 제주의 고령 해녀들에게 요왕할망(용왕)과 그 막내딸인 거북은 일종의 ‘살아지는 신화'(삶을 영위하게 만드는 신화)였는지 모른다”며 “신화적 현실이 그들의 삶과 생업을 지탱해 주는 힘의 원천이었는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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