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선애 감독 신작…사랑과 삶에 눈 떠가는 두 여자 이야기
(서울=연합뉴스) 이영재 기자 = 한 남자를 두 여자가 사랑한다면, 그 두 사람은 서로 라이벌이 될 거라고 생각되기 쉽다.
만약 두 여자가 우정을 맺는다면 어떻게 될까.
임선애 감독의 신작 ‘세기말의 사랑’은 한 남자를 사랑하는 두 여자가 어쩌다 함께 살게 되면서 서로의 고통을 이해하고 자신에 대해서도 눈을 뜨게 되는 이야기다.
이 영화는 2000년의 첫날 컴퓨터가 연도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Y2K'(밀레니엄버그)로 대형 재난이 발생해 지구가 멸망할 수도 있다는 우려가 퍼져 어수선한 분위기이던 1999년 12월 말 어느 제조업체 공장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 회사의 인사과에서 일하는 영미(이유영 분)는 납품 업무를 하는 트럭 기사 도영(노재원)을 짝사랑하지만, 말 한마디 제대로 못 건다.
영미는 도영이 거래처에 납품하고 받은 돈의 일부를 몰래 빼돌린다는 걸 알게 되지만, 자기 돈으로 채워 넣어 문제가 안 되게 한다.
1999년의 마지막 날 밤, 영미는 세상이 끝날 거란 생각에 용기를 쥐어짜 도영에게 데이트를 신청하지만, 사랑의 꿈은 산산조각 난다. 도영이 자기 잘못을 경찰에 자수하면서 횡령죄로 감옥에 가고, 영미는 횡령 방조죄로 처벌받게 된 것이다.
형기를 채우고 교도소에서 나온 영미에게 도영의 아내라는 유진(임선우)이 불쑥 찾아오고, 두 사람의 특별한 여정이 시작된다.
전신마비로 몸을 못 움직이는 유진의 뒷바라지를 하면서 영미는 그의 고통을 이해한다.
유진도 영미의 고통을 들여다본다. 영미가 어린 시절 당한 화상의 상처를 본 유진은 “맨드라미꽃 같다”고 한다. 영미는 마치 누군가가 자기의 어두운 과거를 처음으로 긍정해준 듯한 느낌을 받는다.
영화 속 인물이 다른 영화에서 본 듯한 느낌을 주는 경우가 적지 않지만, 임 감독이 창조한 캐릭터는 대체로 낯설고 새롭다.
그의 전작 ’69세'(2020)의 주인공 효정이 그렇다. 이 영화는 69세에 성폭행을 당한 효정이 사회의 편견에 맞서 스스로 자기를 지켜나가는 이야기다.
‘세기말의 사랑’의 영미와 유진도 마찬가지다. 영미가 라이벌일 수 있는 유진에게 적대감을 품지 않고 동거까지 하게 되는 건 그의 착한 천성과 무관치 않다. 어떤 장면에선 그의 착함이 답답하고 바보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 영화에선 기억에 남을 만큼 아기자기한 장면들이 눈에 띈다. 영미가 김이 서린 창에 작은 하트 모양을 그려놓고 그 속에 들어오는 도영의 얼굴을 훔쳐보는 장면을 꼽을 수 있다.
1999년의 이야기는 흑백 영상이지만, 2000년대가 돼 영미가 교도소에서 나올 때부턴 컬러로 바뀐다.
1999년 말엔 칙칙한 느낌의 근무복 차림이었던 영미는 2000년대엔 빨갛게 염색한 머리에 노란색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고, 분홍색 신발을 신는다. 그렇게 생생한 색채로 그가 새 삶을 사는 걸 보여준다.
이야기를 끌고 가는 이유영과 임선우의 연기가 돋보인다. 상반되는 캐릭터를 맡은 두 사람의 호흡도 자연스럽다.
‘세기말의 사랑’은 제27회 판타지아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됐고,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 ‘한국 영화의 오늘: 파노라마’ 섹션에 초청됐다.
임 감독은 이 영화에 대해 “세기말과 새천년을 통과하던 불완전한 인물이 불완전한 인물을 만나 사랑 때문에 세상을 상냥하게 바라보게 되고, 자기 삶이 완전하지는 못해도 미워하지 않을 수 있는 용기를 배우는, 스스로 자기 삶을 구원하는 이야기”라고 소개했다.
24일 개봉. 118분. 12세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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