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로 보는 세상] 사전트, 초상화, 스캔들

(서울=연합뉴스) 도광환 기자 = 미국 보스턴을 여행한다면 꼭 가볼 미술관이 있다. ‘이사벨라 스튜어트 가드너 미술관’이다. 1903년 설립한 미국 최초의 사립미술관이다.

이사벨라(1840~1924)가 자신의 저택을 미술관으로 만든 것인데, 중앙 정원이 특히 아름다우며, 방마다 유럽 화가들의 뛰어난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이사벨라 스튜어트 가드너 미술관’ 중앙 정원
도광환 촬영

이사벨라는 영국 스튜어트 왕가 혈통을 이어받은 귀족이었다. 미국 부호 가드너와 결혼하면서 미술에 빠져 여러 경로로 수집한 작품들로 미술관을 열었다.

이 미술관에서 가장 눈에 띄는 작품은 존 싱어 사전트(1856~1925)가 그린 그녀 전신 초상화다. (1888) 사전트 특유의 피부 표현과 세심한 붓질을 음미할 수 있다.

‘이사벨라 부인의 초상화’
이사벨라 스튜어트 가드너 미술관 소장

이 작품은 보수적인 동부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렸다. 정면 자세에서 깊게 파인 옷 때문이었다. 결국 남편인 가드너는 이 작품을 전시하지 않을 것을 결정해야만 했다.

이 초상화 이외 사전트는 그녀를 다수 그렸다. 이사벨라는 모든 작품을 마음에 들어 하며 사전트와 각별한 ‘후원자-화가’ 관계를 유지했다.

뛰어난 초상화가였던 사전트가 남긴 다른 스캔들은 이 작품이 일으킨 뒷이야기보다 훨씬 크고 깊다. 파리에서 그린 ‘마담 X'(1884)다.

‘마담 X의 초상’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

고귀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검정 드레스와 갈색의 배경, 그에 대비되는 눈부신 피부, 고고한 표정으로 옆쪽을 바라보는 엄숙함과 두 손의 자세 등은 감상자들 숨을 멎게 할 정도다. ‘우아하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하다.

그림 제목이 첩보영화 암호명 같은데, 첩보영화처럼 그림에 얽힌 뒷이야기가 있다.

당시 파리 사교계에서 가장 이름 높은 여인은 피에르 고트로 부인(1859~1915)이었다. 많은 화가가 그녀를 그리고 싶어 했다. 사전트도 그녀에게 끈질기게 구애해 허락받았다. 그림을 완성한 1884년, 실명은 밝히지 않고 ‘마담 X’로 파리 살롱에 전시했다.

최고 인기 그림이었지만, 스캔들이 발생했다. 고트로 부인은 울며불며 전시를 중단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유는?

이 그림은 스캔들이 발생한 뒤 사전트가 수정한 것이다. 전시 당시 그림에서는 왼쪽 어깨끈이 벗겨져 어깨가 노출된 그림이었다. 그림을 본 사람들은 ‘지체 높은’ 부인을 두고 ‘상상하기’ 시작했다.

1884년 전시 때 찍은 작품 사진

사전트는 계속되는 비난을 감당하지 못하고 파리를 떠나 런던으로 향했으며, 이후 미국으로 건너와 활동하며 이사벨라 초상화를 연이어 그리게 된 것이다.

사전트는 ‘마담 X’를 두고 ‘내가 그린 최고의 그림’이라고 애착하며 계속 곁에 뒀다.

1885년 사전트 화실에서 찍은 사진. 작품 어깨끈이 수정돼 있다.

고트로 부인도, 이사벨라도 사전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사전트는 고트르 부인이 죽은 뒤에야 ‘마담 X’를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팔았다. 2015년 미술관 측은 첨단 장비를 동원해 수정되기 전 작품을 실물 크기 디지털 버전으로 완성해 비교 전시하기도 한다.

사전트가 그린 고트르 부인과 이사벨라 전신 초상화를 직접 보면, 그림 속 여인들이 튀어나와 말을 거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작가가 초상화를 그리는 일은 내면에 숨은 영혼을 담아내는 일이다. 사전트는 두 여인을 진심으로 사랑한 것이 아닐까? 육체적인 욕망이 아니라 정신적인 사랑 말이다. 진정한 사랑은 욕망을 뛰어넘는다.

dohh@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