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정전 밝히는 빛·흩날리는 먹 향…”지금 창덕궁과 만나볼까요”

‘궁중문화축전’ 첫 공예전시 맡은 구병준 감독…인정전, 전시 공간 첫 활용

“욕심 버리고 창덕궁 위한 전시 고민”…전통 장인·공예 작가 협업 눈길

전통 장인과 함께 만든 부채
[구병준 감독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연합뉴스) 김예나 기자 = 조선 초기인 1405년 창건된 창덕궁은 여러 궁궐 가운데 가장 오랫동안 임금이 머무르며 정사를 펼친 곳이다.

어진 정치를 펼친다는 뜻을 가진 인정전에서는 왕의 즉위식을 비롯해 국가의 주요한 행사가 열렸고, 선정전은 왕의 공식 집무실인 편전(便殿)으로 쓰였다.

조선 왕조의 역사와 흔적이 스며든 이 공간이 전통공예와 어우러진다.

이달 27일부터 5월 5일까지 서울의 주요 궁궐과 종묘 일대에서 펼쳐지는 ‘궁중문화축전’ 10주년 행사를 맞아 처음 선보이는 ‘공생(共生) : 시공간의 중첩’ 전시에서다.

전시를 기획한 구병준 감독은 7일 연합뉴스와 인터뷰에서 “600여 년 세월에 담긴 창덕궁의 시·공간을 공생, 즉 같이 산다는 키워드로 엮어낸 전시”라고 소개했다.

창덕궁 인정전에 전시될 좌등
[구병준 감독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2023년 밀라노 한국공예전,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디자인 페어 등 굵직한 전시·행사를 여러 차례 해온 구 감독이 ‘궁중문화축전’에 참여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구 감독은 “오래전부터 궁에서 전시를 기획해보고 싶다고 생각했기에 단번에 제안을 수락했다. 떨리는 마음보다는 어떻게 하면 더 잘할 수 있을까 기대가 컸다”고 말하며 웃었다.

궁에서 열리는 다른 행사가 그렇듯, 사실 전시를 준비하는 과정은 만만치 않았다.

국보인 창덕궁 인정전은 그간 제한적으로 내부를 공개한 적 있지만, 전시 공간으로 활용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전시 기획부터 준비, 작품 제작 등 과정 하나하나가 쉽지 않았다고 한다.

구 감독은 “임금이 있으시던 공간인 전(殿) 내부를 활용한 전시는 처음일 것”이라며 “창덕궁의 역사와 문화, 그 안에 담긴 이야기를 전하려면 꼭 필요한 공간이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전통 단청색을 활용한 병풍
[구병준 감독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전시는 창덕궁의 옛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데서 벗어나 참신한 시도를 더 한다.

예를 들어 왕이 앉는 어좌(御座)는 공간의 가운데에 있으며 이를 기준으로 좌우 대칭을 이룬다. 전시에서는 여기에 전통 조명인 좌등 형태를 활용한 공예품 8점을 양쪽에 뒀다.

국가무형문화재 한지장 보유자인 안치용 장인, 김동규 소목장 이수자, 차병갑 국가유산수리기능자 배첩 장인, 권중모 한지공예 작가 4명이 머리를 맞대 협업한 작품이다.

구 감독은 “인정적 천정에는 녹색, 금색 단청 등 옛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이를 제대로 보여주기 위해 바닥에 거울을 설치해 마치 물에 비친 듯한 모습을 보여줄 것”이라고 설명했다.

창덕궁 인정전 천정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또, “소리에 반응하는 사운드 반응형 조명도 넣어 시각, 청각 등 다양한 감각으로 창덕궁 정전의 위험과 기품을 ‘빛’이라는 주제로 느낄 수 있도록 꾸몄다”고 강조했다.

선정전, 성정각, 희정당 등 다른 전시 공간 역시 건물의 역사성을 고려해 꾸민다.

왕이 공식 집무실로 쓰며 정치를 논하던 선정전에는 전통 단청의 색을 활용한 현대식 병풍을 뒀고, 왕세자가 공부하던 성정각 일대에는 부채와 전통 염색 기법을 활용한 공예품으로 꾸밀 예정이다.

구 감독은 “성정각은 조선 왕조의 기품과 유교 문화가 깃든 공간”이라며 “바람길을 따라 부채가 움직이고 그 시절 선비에게서 났을 법한 먹 향이 널리 퍼지도록 구성했다”고 말했다.

구병준 감독
[구병준 감독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전시를 위해 특별히 만든 먹 향은 ‘서울의 향’이라는 이름으로 굿즈(goods·상품)로 만들 계획이다.

어려운 점은 없었을까. 구 감독은 한참 고민한 끝에 “욕심을 버린 전시”라고 말했다.

“창덕궁이라는 공간은 그 자체로 대단한 유산입니다. 제가 하고 싶은 대로 공간을 꾸미거나 보여주기식으로 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고민하고 또 고민했죠.”

구 감독은 “한지, 단청, 염색 등 여러 종류의 무형유산 장인들과 함께했지만, 오직 창덕궁을 위한 전시가 목표였다”며 “궁이라는 공간에 어우러진 작품을 찾고자 했다”고 강조했다.

그는 “한 명이 한 작품을 책임지는 게 아니라 서로 협업해야 하는 만큼 걱정도 많았는데 전통문화를 토대로 새로운 시도를 해보자고 이야기할 때면 장인들이 먼저 좋아하셨다”고 귀띔했다.

‘공생: 시공간의 중첩’ 전시 참여 작가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안치용 한지장 보유자, 김동해 금속공예가, 최문정 단청장 전승교육사, 권중모 한지공예가 [구병준 감독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구 감독은 이번 전시를 통해 한국 문화가 가진 가능성이 널리 알려지기를 바랐다.

그는 “전시를 준비할 때마다 이 공간에서 무엇을, 어떻게, 또 어떤 이유로 보여줘야 할지 고민하게 된다”며 “한국의 전통공예도 그 합을 잘 맞추다 보면 멋있고, 또 세련되게 보여줄 수 있다”고 힘줘 말했다.

그는 “창덕궁의 아름다움과 더불어 한국인의 정서, 감정, 느낌을 관람객과 함께 나누고 싶다”며 “과거, 현재, 미래 그 모든 시간과 공간이 맞닿아 있는 ‘공생’ 지금, 이 순간에 주목해달라”고 강조했다.

전시 베테랑인 그에게 혹시 도전해보고 싶은 전시 공간이 있을까.

그는 조선 왕조의 왕과 왕비, 그리고 죽은 후 왕으로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시는 종묘를 꼽으며 “한국에서 가장 멋진 공간 중 한 곳”이라고 평가했다.

“누군가는 궁궐, 종묘를 보면서 옛 문화가 남아있는 곳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공간의 의미를 잘 살리면 눈길을 사로잡고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장소가 될 수 있습니다.” (웃음)

‘공생: 시공간의 중첩’ 전시 참여 작가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방화선 전북무형문화재 선자장 기능보유자, 윤영숙 염색장 이수자, 차병갑 국가유산수리기능자 배첩 장인, 김동규 소목장 이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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