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이소룡’ 꿈꾼 사람들 이야기…열혈 팬 이경규가 수입
(서울=연합뉴스) 이영재 기자 = 4050 세대 남성이라면 어린 시절 쌍절곤에 한 번쯤 매혹된 기억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짤막한 막대기 두 개를 쇠사슬로 이어놓은 무기다.
학교 앞 문구점 같은 곳에서 쌍절곤을 팔았다. 부모를 졸라 쌍절곤을 손에 넣은 아이들은 장난감처럼 보이는 이 무기를 열심히도 휘둘러댔다.
당시 쌍절곤의 유행은 홍콩 액션 영화의 영향 때문이었고, 그 진원지는 리샤오룽(이소룡)이었다.
데이비드 그레고리 감독의 ‘이소룡-들’은 리샤오룽이 구축한 영화 세계가 그의 사후에도 전 세계 대중의 열광 속에서 팽창하는 과정을 조명한 다큐멘터리다.
1940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난 리샤오룽은 어린 시절 홍콩에서 자라면서 아역배우로 활동했다.
잦은 싸움질로 문제를 일으켜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쿵후를 토대로 창시한 무술인 절권도를 연마하다가 TV 시리즈 ‘그린 호넷’에 출연하면서 주목받았다.
서른한 살에 홍콩으로 돌아온 리샤오룽은 ‘당산대형'(1971), ‘정무문'(1972), ‘맹룡과강'(1972), ‘용쟁호투'(1973) 등의 작품이 잇달아 성공을 거두면서 글로벌 스타로 떠올랐다.
리샤오룽이 격투할 때 내지르는 괴성, 적을 정확하게 타격하고는 부르르 떠는 몸짓, 적이 마침내 쓰러지면 엄지 끝으로 콧방울을 쓱 문지르는 제스처 등은 그의 현란한 무술에 독특한 느낌을 부여했다.
그는 1973년 ‘용쟁호투’의 개봉을 앞두고 뇌부종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영광의 길에 발을 딛자마자 바람처럼 사라진 셈이다.
그러나 전 세계 팬들의 열광이 남아 있는 한 리샤오룽의 영화 세계는 계속 뻗어나가야만 했다. 그를 대신해 깃발을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고, 홍콩 영화계는 후계자가 될 만한 인물을 찾아 나섰다.
‘이소룡-들’은 그렇게 리샤오룽의 후계자로 떠오른 배우 네 명을 조명한다. 각각 타이완, 미얀마, 홍콩 출신인 배우들과 한국의 거룡(문경석)이 그들이다. 모두 리샤오룽을 닮은 외모에 뛰어난 무술 실력을 갖췄다.
이들은 리샤오룽이 남긴 작품의 속편과 스핀오프(파생작)뿐 아니라 리샤오룽 전기 영화 등 그의 사후 쏟아져 나온 작품들의 주인공을 맡았다.
이 작품들은 ‘브루스플로이테이션’이라는 이름의 장르를 이뤘다. 트렌드에 편승한 B급 영화에 붙는 수식어 ‘익스플로이테이션’과 리샤오룽의 영어 이름 브루스 리의 합성어다.
‘이소룡-들’은 이 작품들의 주요 장면을 보여주고, 지금은 노년에 접어든 거룡 등이 출연해 당시 촬영 현장의 뒷이야기를 들려준다.
수백 편에 달하는 작품이 쏟아지면서 졸작도 많았다. 리샤오룽과 스파이더맨의 대결과 같은 기상천외한 설정의 장면들은 웃음을 자아낸다. 영화 속 인터뷰에서 당시를 회상하던 사람들도 웃음을 못 참곤 한다.
그러나 반백의 노인이 된 옛 배우들이 젊은 시절 못지않게 절도 있는 액션 동작을 선보이는 장면에선 그들의 진심과 열정이 느껴져 숙연해지기도 한다.
‘이소룡-들’은 홍콩 스타 훙진바오(홍금보)와 청룽(성룡)도 리샤오룽이 구축한 영화 세계의 맥락에서 조명한다. 두 사람은 리샤오룽의 유산을 물려받았지만, 각자 자기만의 세계를 창조해냈다.
중년의 관객이 ‘이소룡-들’을 본다면 어린 시절 흠뻑 빠졌던 홍콩 액션 영화의 향수에 젖을 수 있다. 젊은 관객은 한 시대를 주름잡은 콘텐츠의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생각해볼 수 있다.
‘이소룡-들’은 코미디언 이경규가 공동 대표인 연예기획사 에이디지컴퍼니가 수입했다. 이경규도 어린 시절부터 책가방에 쌍절곤을 넣고 다닌 리샤오룽의 열혈 팬이었다.
그는 “이소룡은 내 영혼의 한 부분을 차지했다. 내 첫 영화 ‘복수혈전’도 그의 영향으로 만들었다”며 “이소룡을 잘 모르는 분들은 (‘이소룡-들’을 보고) 그가 왜 한 시대를 뒤흔들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19일 개봉. 95분. 15세 관람가.
ljglory@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