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연구가’ 노승석 씨, 삼도수군통제영 최초 위치 연구
(서울=연합뉴스) 김예나 기자 = “꿈에 적의 형상이 보였다. 그래서 새벽에 각 도의 대장에게 알려서 바깥 바다로 나가 진을 치게 하였다.” (‘난중일기’ 1593년 8월 25일 기록)
1593년 충무공 이순신(1545∼1598)의 어깨는 무거웠다.
2∼3월에는 웅포 일대에서 왜군과 7차례 접전을 치렀고, 6월에는 견내량에서 해전을 치렀다. 그해 8월부터는 경상·전라·충청도 3도의 수군을 지휘, 통솔했다.
당시 조선의 임금인 선조(재위 1567∼1608)는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한다. 삼남 지방의 수군을 이끌던 총사령관의 본영, 삼도수군통제영의 시작점은 어디일까.
12일 학계에 따르면 노승석 동국대 여해연구소 학술위원장은 한림대 태동고전연구소가 펴내는 학술지 ‘태동고전연구’에 실린 논문에서 “최초의 통제영은 통영 한산도”라고 밝혔다.
이순신이 약 3년 7개월 동안 삼도수군통제사로 활약한 점은 잘 알려져 있다.
통제영의 중심 건물인 국보 ‘통영 세병관(洗兵館)’이 남아있으며 백화당, 정해정 등이 있던 터를 일부 정비·복원해 현재 사적(통영 삼도수군통제영)으로 관리 중이다.
국가유산청의 국가유산포털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의 한산 진영이 최초의 통제영”이라고 설명하고 있으나, 전라좌수영이 있던 전남 여수가 첫 통제영이라는 견해도 있다.
이에 대해 노 위원장은 여수가 삼도수군통제영이라는 주장은 ‘잘못’이라고 봤다.
그는 이순신이 임진왜란 중에 작성한 ‘난중일기’를 언급하며 “실제 ‘난중일기’에는 여수와 전라좌수영에 삼도의 수군이 모였다는 내용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이어 “여수의 전라좌수영이 지리적으로 편중돼 있어 일본군의 해상 침입을 방어하는 데 한계가 있음을 인식한 이순신은 (1593년) 7월 15일 진영을 한산도 두을포로 옮겼다”고 주장했다.
노 위원장은 이순신이 한산도를 ‘해영'(海營)으로 기록한 점도 중요하게 봤다.
그는 “해영이란 통제사가 있는 바다의 영(營·병영의 문)으로 통제영으로 해석된다”며 “선조가 1597년 (이순신에게 내린) 통제사 복직 교서에서도 ‘해영’이라고 언급돼 있다”고 설명했다.
노 위원장은 최초의 통제영이 한산도에 설치됐음을 보여주는 기록이 여럿 있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1795년 정조(재위 1776∼1800)의 명을 받아 편찬된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에는 한산도 통제영의 창설 의의와 배경 상황이 잘 설명돼 있다고 그는 전했다.
노 위원장은 “충무공이 전라좌수사로 재직하던 시기에 여수에서 삼도수군통제사직을 겸직으로 받았다는 이유가 (최초의 통제영이라는 주장의) 근거가 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한산도 통제영의 규모와 운영 상황을 유추해볼 수 있는 자료 등을 토대로 볼 때 한산도 내의 통제영 존재를 결코 부정할 수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노 위원장은 제63회 통영한산대첩축제의 프로그램 중 하나로 이날 통영 역사홍보관에서 열리는 ‘두룡포 통제영 설치 420주년 기념 학술 세미나’에서 이 내용을 발표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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