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국제영화제 올해의 아시아영화인상…”늘 빙글빙글 맴도는 듯”
(부산=연합뉴스) 이영재 기자 = 구로사와 기요시(69) 감독은 야쿠쇼 고지 주연의 ‘큐어'(1997)로 세계 영화계에서 주목받은 일본의 거장이다.
‘큐어’에서 보듯 그는 공포와 스릴을 자아내는 독특한 연출로 팬덤이 형성돼 있는 감독이기도 하다.
구로사와 감독은 2일 개막한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아시아 영화산업과 문화 발전에 기여한 사람에게 수여되는 올해의 아시아영화인상을 받았다.
“40년 넘게 영화를 만들다 보니 일본에선 베테랑이라는 말도 많이 듣지만, 영화 한 편을 찍고 나면 다음엔 어떤 것을 찍을까 늘 고민할 정도로 아직 나만의 테마나 스타일은 가지고 있지 못한 것 같습니다.”
구로사와 감독은 3일 부산 해운대구의 한 백화점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겸양의 표현일 수도 있지만, 칠순의 나이에도 늘 새로움을 모색하는 거장의 진솔한 말로 받아들여졌다.
그는 “360도 어느 각도에서 봐도 부족함 없는 영화를 찍고 싶은데, 다 찍고 난 영화를 보면 늘 어떤 부분이 빠져 있다”며 “그러다 보니 (이 각도 저 각도에서 부족한 점을 찾아내면서) 빙글빙글 맴돌기만 하는 것 같다”고 털어놨다.
이번 영화제에선 구로사와 감독의 ‘뱀의 길’과 ‘클라우드’가 갈라 프레젠테이션 섹션에 초청됐다. 두 편 모두 올해 개봉한 신작이다.
구로사와 감독은 “한 해 두 편을 찍은 69세 감독은 잘 없을 것 같다. 이 점에서 나는 좀 유별난 감독이 아닌가 싶다”며 웃었다.
‘뱀의 길’은 구로사와 감독이 1998년 연출한 동명 작품을 리메이크한 영화로, 자기 작품을 다시 만든 드문 사례다. 프랑스 제작사에서 전작 중 한 편을 리메이크하자고 제안하면서 연출하게 됐다고 한다.
일본 야쿠자 영화인 전작과 달리 프랑스를 배경으로 컬트 단체를 다룬 데다 주인공도 여성으로 바꿔 이야기의 분위기는 크게 다르다.
‘클라우드’는 온갖 물건을 헐값에 사들여 온라인에서 비싸게 파는 남성이 집단 폭력의 표적이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로, 일본 톱스타 스다 마사키가 주연했다.
구로사와 감독은 ‘클라우드’를 “야쿠자, 경찰, 살인범처럼 폭력과 가까운 사람을 그린 액션 영화와는 달리 폭력과 인연이 먼 보통 사람이 죽고 죽이는 극한적 상황으로 치닫는 영화”라고 소개했다.
자기 영화의 출발점으로 리얼리즘을 꼽은 그는 “항상 ‘현실은 이렇다’는 생각에서 출발한다”며 “여기에 리얼리즘의 비약적 전개를 가미하고 영화로만 그려낼 수 있는 순간을 집어넣으려고 한다”고 말했다.
‘큐어’ 외에도 ‘회로'(2001)와 ‘절규'(2006) 등 장르적 색채가 뚜렷한 영화를 주로 만들어온 구로사와 감독은 장르영화의 대가로도 꼽힌다.
그는 “영화적으로만 가능한 순간이 스크린에 표현되면 관객은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릴 수 없어 못이라도 박힌 듯 스크린에 집중하게 되고 영화가 끝난 뒤에도 다시 보고 싶은 마음을 가진다. 그것이 장르영화의 매력”이라고 말했다.
또 “요즘 들어 일본에선 장르영화를 하려는 젊은 감독이 없어 아쉽다”며 “한국에선 그런 작업을 하는 젊은 감독이 많다고 들었다. 부러울 따름”이라고 털어놨다.
그는 “사회문제를 제기하고 신랄하게 비판하는 영화도, 인간의 마음을 파헤치는 영화도 만들 수 있지만, 무엇보다도 영화적인 것이 중요하다”며 “영화만으로 표현할 수 있는 그 무엇을 꼭 지켜야 한다. 그래야 영화의 길이 넓어진다”고 강조했다.
구로사와 감독이 이번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에서 올해의 아시아영화인상을 받을 때 봉준호 감독은 영상 메시지를 보내 자신이 “구로사와 감독님의 오랜 광팬”이라며 축하했다.
봉 감독을 “내 한국인 친구 중 한 명”으로 소개한 구로사와 감독은 “봉 감독이 그동안 너무 유명해지고 세계적인 거장으로 인정받으면서 내 손이 안 닿는 구름 속 존재로 생각했는데, 아직 나를 친구로 생각해주는구나 싶어 기뻤다”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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