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상, ’60대 이상 서구 남성’ 편중 깨고 ’50대 아시아 여성’ 품으로
‘AI 화두’ 예측 속 물리학·화학 2개 분야 휩쓸며 주인공 된 인공지능
日 피폭단체 택한 평화상엔 “우크라·중동 포성에도 핵심 비켜가” 논란도
영미권 남성 편중 뚜렷…개인 수상자 8명중 非영미권·여성은 한강 유일
(서울=연합뉴스) 권수현 기자 = 올해로 124년을 맞은 노벨상은 어느 정도 예측은 됐지만 예상 범위를 훨씬 뛰어넘는 수상 사례를 잇따라 배출했다는 점에서 ‘예견된 파격’이라고 할만하다.
우선 매년 노벨상 수상 분야 가운데 가장 큰 관심이 집중되는 문학상 수상자로 한국 여성 작가 한강이 선정되며 한국을 넘어 전세계를 놀라게 했다.
한강은 아시아 여성 최초이자 한국인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품에 안으며 K-문학의 저력을 전세계에 떨쳤다.
올해 문학상이 여성 작가에게 돌아갈 것이라는 예상은 일찌감치 나왔으나 주요 후보로 거론되지 않았던 50대 아시아 여성 작가의 수상은 그동안 노벨문학상의 관행을 깨는 신선한 파격으로 받아들여졌다.
과학 분야에서는 인공지능(AI)이 주인공이었다. AI는 유력한 수상 후보로 거론되면서도 동시에 실제 수상은 아직 이르다는 관측도 나왔는데, 물리학상에 이어 화학상까지 가져가며 AI 시대를 활짝 열었다.
평화상은 일본 원폭 생존자 단체에 돌아간 가운데 우크라이나와 가자지구 등 2개 전쟁이 계속되는 와중에 ‘핵심’을 비켜 간 선택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 ‘젊은 아시아 여성 작가’ 한강 문학상에 전 세계 ‘깜짝’
‘소년이 온다’, ‘채식주의자’ 등의 소설로 세계적 인지도를 쌓은 한강(53)은 한국인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며 한국 문학의 새 역사를 썼다.
아시아 여성의 노벨 문학상 수상은 한강이 처음이다. 여성 작가로서는 역대 18번째 수상자다.
올해 노벨 문학상은 아시아 여성 작가의 수상이 유력하게 점쳐졌다는 점에서 한강의 수상은 어느 정도로는 예측이 맞아떨어졌다고 볼 수 있다.
노벨 문학상은 최근 10여년간 남녀가 번갈아 받는 추세가 굳어졌는데 지난해에는 노르웨이 남성 작가 욘 포세가 받았기 때문이다. 또 아시아 작가의 수상은 2012년 중국 모옌 이후 12년간 없었다.
하지만 올해 노벨문학상 주요 후보로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한강의 수상은 이변으로도 받아들여졌다.
한강이 앞서 영국 맨부커, 프랑스 메디치상 등을 받으며 이미 국제적으로 상당한 명성을 쌓은 작가이지만 유력 후보군에서 빠졌던 것은 아시아 국가 중에서도 덜 알려진 한국 작가라는 점이 컸다. 중국과 일본은 앞서 이미 노벨 문학상 작가를 배출했고 매년 유력 후보군에 자국 문인들이 거론되곤 했다.
작가로서는 상대적으로 젊은 한강의 나이도 영향을 미쳤다. 노벨 문학상은 한 작가의 작품 세계 전반을 평가해 수상자를 정하기 때문에 60∼70대 이상 연령대 수상자가 압도적으로 많다. 유력 후보로 거론된 작가들도 대부분 70대 이상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의 젊은 여성 작가’ 한강이 수상하자 주요 외신과 문학계는 예측 밖이었다며 놀라움을 표했다.
NYT는 중국 작가 찬쉐 등이 올해 유력 후보였다는 점을 들어 한강의 수상은 “놀라운 일”(surprise)이라고 표현했고, 프랑스 일간 르피가로는 “예상을 뒤엎었다”고 전했다. 리베라시옹은 “올해 수상자 선정은 문화 엘리트들을 놀라게 할 것”이라고 짚었다.
한강의 노벨 문학상 수상으로 한국 문학은 물론 한국 문화 전반도 다시금 주목받았다. AP와 AFP통신 등은 드라마 시리즈와 영화, K팝 등 한류 전반의 흐름을 짚으며 한국 문화의 글로벌 영향력이 커지며 주류로 자리 잡았다고 평했다.
◇ 과학 분야 주인공은 AI…첫 등장에 물리학상·화학상 휩쓸어
올해 노벨상 무대에서는 AI 관련 연구가 물리학상에 이어 화학상까지 가져가며 과학 부문의 주인공이 됐다.
8일 발표된 물리학상은 AI 머신러닝(기계학습)의 기초를 확립한 존 홉필드(91) 미 프린스턴대 명예교수와 구글 부사장을 지낸 제프리 힌턴(76) 캐나다 토론토대 교수가 받았다.
이어 9일에는 구글의 AI기업 딥마인드의 데미스 허사비스 최고경영자(CEO)와 존 점퍼 연구원(39)이 미국 생화학자 데이비드 베이커(62)와 함께 화학상을 공동 수상했다.
허사비스와 점퍼는 단백질 구조를 파악하는 AI 모델 ‘알파폴드’ 개발 공로를, 베이커는 ‘단백질 설계 예측’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최근 급격히 발전하며 거대 혁신으로 주목받은 AI 기술은 올해 노벨상 수상이 유력하다고 일찌감치 거론됐다.
글로벌 정보분석 서비스 기업 클래리베이트(Clarivate)의 과학정보연구소의 연구분석 책임자인 데이비드 펜들베리는 구글의 AI 기업 딥마인드의 과학자들이 화학상 후보로 고려되고 있을 수도 있다고 예측한 바 있다.
하지만 AI가 그동안 주로 순수 학문 분야에 수여됐던 노벨상을 올해 처음 받으면서 2개 부문을 ‘접수’한 것은 이변으로 받아들여졌다.
AI를 필두로 한 컴퓨터 과학은 순수 학문이라기보다는 프로그램이자 기술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학계가 아닌 업계 출신이 노벨상을 받은 것 역시 이례적이다. 허사비스 CEO와 점퍼, 힌턴 교수 세 사람 모두 빅테크 구글의 전·현직자다.
학계 안팎에서는 현대 과학의 전면에 AI가 등장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NYT는 오렌 에치오니 워싱턴대 컴퓨터과학 명예교수를 인용해 올해는 노벨위원회가 인공지능을 주목한 해였다며 “인공지능이 과학계에서 얼마나 영향력을 키웠는지 인식한 것”이라고 전했다.
국제학술지 네이처도 “AI가 노벨상에 왔다”고 평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노벨상 측이 학문적 발견보다 컴퓨터를 이용한 방법론에 집중한 점을 비판하는 ‘AI 2관왕’이 과학 분야에 대한 논쟁도 불러일으켰다고 덧붙였다.
AI 기술을 둘러싼 논란도 커질 전망이다. 당장 힌턴 교수와 허사비스 CEO 등 수상자들도 소감을 전하면서 AI가 통제 불능이 돼 인류를 위협할 가능성에 대비해야 한다는 취지의 경고를 했다.
한편 생리의학상은 유전자 조절에 핵심적 역할을 하는 마이크로 RNA 발견에 기여한 미국 생물학자 빅터 앰브로스(70)와 게리 러브컨(72)에게 돌아갔다.
◇ 평화상은 일본 반핵 단체…’전쟁통 비켜 갔다’ 비판도
인류의 평화에 이바지한 공로를 기리는 노벨 평화상은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와 우크라이나, 수단 등 지구촌 곳곳에서 계속되는 포화로 암울한 분위기 속에 발표됐다.
전쟁통에 발표되는 평화상인 만큼 노벨위원회가 수상자 선정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지에 관심이 쏠린 가운데 반핵 운동을 펼쳐 온 원폭 생존자 단체 일본 원폭피해자단체협의회(日本被團協·니혼히단쿄)가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노벨위원회는 니혼 히단쿄가 “핵무기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핵 금기'(the nuclear taboo)의 확립에 크게 기여했다”며 선정 이유를 설명했다.
이를 두고 원폭 투하 80주년을 한해 앞두고 핵무기 위험성과 핵 군축·군비 통제 필요성을 환기하려는 의도라는 해석이 나왔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이번 수상자 선정이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우크라이나, 수단 등 현재 진행형인 전쟁들과 직접적 연관이 없다는 점을 비판하고 있다.
특히 유엔 팔레스타인난민구호기구(UNRWA)나 국제사법재판소(ICJ) 등 유력하게 거론됐으나 이스라엘 측에서 반대하는 후보의 수상이 불발된 것을 두고 노벨위원회가 논쟁을 피해 가려 한 것이 아니냐는 지적과 올해 노벨평화상을 보류했어야 한다는 의견도 제기됐다.
◇ 개인 수상자 8명 평균나이 64세…여성은 한강 유일
노벨상은 총 6개 부문 가운데 지난 7∼11일 5개 부문 수상자가 정해졌고 경제학상 발표만 앞두고 있다.
지금까지 발표된 수상자 가운데 개인은 8명으로, 이들의 평균 나이는 63.9세다. 최고령자는 물리학상을 받은 홉필드, 최연소자는 화학상을 받은 점퍼다.
여성은 한강 1명이고 나머지는 모두 남성이다. 또 한강을 제외한 나머지 수상자들은 모두 미국 또는 영국 출신이어서 올해 노벨상은 앵글로색슨(북미·영국)계 남성 편중이 두드러진 것으로 나타났다.
경제학상은 14일 중부유럽표준시로 오전 11시 45분(한국시간 오후 6시 45분) 이후에 발표된다.
노벨상 다른 분야는 알프레드 노벨(1833∼1896)의 유언에 따라 제정돼 1901년부터 수여됐는데 경제학상은 그보다 한참 늦게 시작됐다.
스웨덴 중앙은행이 창립 300주년을 맞아 상을 제정하기로 하고 노벨 재단에 기부한 출연 재산을 기반으로 1969년부터 시상하고 있다.
노벨 경제학상으로 통칭되지만 정식 명칭은 ‘알프레드 노벨 기념 스웨덴 중앙은행 경제학상’인 것도 이 때문이다.
다른 분야 노벨상은 전쟁 등으로 중간에 공백기가 있기도 했으나 경제학상은 1969년부터 매년 빠지지 않고 수여됐다.
지난해까지 수상자는 총 93명이다. 단독 수상이 26차례, 2명 공동수상이 20차례, 3명 공동수상은 9차례 나왔다. 여성 수상자는 3명이다.
노벨상 시상식은 노벨의 기일인 12월 10일에 열린다. 물리학·화학·생리의학·문학·경제학상은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평화상은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수여된다.
수상자에게는 메달과 상금 1천100만 스웨덴 크로나(약 14억3천만원)가 주어진다.
inishmore@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