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미키 매디슨 뛰어난 연기
(서울=연합뉴스) 이영재 기자 = 영화는 아름다운 환상을 스크린에 펼쳐내면서 관객이 고통스러운 현실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지만, 때로는 환상을 파괴함으로써 관객을 차가운 현실 앞에 세우기도 한다.
올해 칸국제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숀 베이커 감독의 ‘아노라’가 그런 영화다.
이 영화는 미국 뉴욕의 시끌벅적한 클럽에서 스트리퍼로 일하는 여성 아노라(미키 매디슨 분)의 이야기다.
영화 속 아노라는 서비스 노동자로 그려진다. 동료 직원들과 사용자가 있고, 업무 능력에 따라 평가받는다. 꽤 자유롭게 일주일 휴가를 쓸 수도 있다.
아노라는 몸을 갈아 넣듯 일하지만, 벌이는 시원치 않다. 전철이 시끄러운 소리를 내면서 도착하는 역사 바로 앞 다닥다닥 늘어선 남루한 집에 사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어느 날 클럽에 놀러 온 러시아 갑부 아들 이반(마크 에이델슈테인)이 아노라에게 반하면서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아노라에게 푹 빠진 철부지 이반이 급기야 청혼하고, 반신반의하던 아노라가 손을 내밀면서 둘은 부부가 된다. 여기까지만 해도 영락없는 신데렐라 이야기지만, 환상이 깨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이반의 부모가 러시아에서 아들의 결혼 소식을 듣고 부하 셋을 급파해 신혼부부를 갈라놓으려고 하면서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다.
아노라의 꿈이 산산이 깨지는 과정에서 우리 시대의 현실이 모습을 드러낸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부자가 될 수 없는 아노라는 이반처럼 노동하지 않고도 돈을 펑펑 쓰는 삶으로 건너가 ‘인생 역전’에 성공했다고 생각하지만, 두 사람 사이엔 지옥과 천국을 가른다고 해도 좋을 만한 심연이 놓여 있다.
궁지에 몰린 아노라는 법에 호소하려고 하지만, 사법 제도라고 하는 것도 가진 자의 편이다. 러시아 갑부의 변호사는 합법적으로 결혼을 무효로 만들 길을 고안해내고, 아노라는 분노에 차 방방 뛰기만 할 뿐이다.
21세기 버전의 신데렐라 이야기를 완성하는 듯하다가 여지 없이 무너뜨리고 마는 ‘아노라’는 20세기 신데렐라 이야기인 줄리아 로버츠 주연의 ‘귀여운 여인'(1990)을 떠올리게 한다.
냉전 체제가 무너지고 세계화와 번영의 낙관주의가 힘을 얻던 시절 신데렐라의 꿈을 아름답게 완성한 ‘귀여운 여인’이 나오고, 그로부터 30여년이 지나 환멸과 불안감이 확산하는 지금 ‘아노라’가 나온 것도 우연으로 치부할 수는 없어 보인다.
영화는 아노라가 사는 뉴욕 빈민가의 겨울만큼이나 스산한 현실을 그리지만, 유머를 잃지 않는다. 러시아 갑부의 명령을 따르는 삼인방과 아노라가 벌이는 다툼과 소동이 곳곳에서 웃음을 불러일으키면서 블랙코미디가 완성된다.
무엇보다 돋보이는 것은 아노라 역을 맡은 미키 매디슨의 연기다. 러시아 갑부의 아내가 되려는 허황한 꿈에서 깨어나기 싫어 발버둥 치면서도 인간의 존엄성을 포기하지 않는 아노라를 매디슨은 감동적으로 그려낸다.
천박한 욕설을 끝도 없이 늘어놓는 아노라가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순전히 매디슨의 힘이다. 매디슨의 연기에 관객은 누구나 아노라가 되고, 마지막 장면에 가슴을 저미게 된다.
‘플로리다 프로젝트'(2018)와 ‘탠저린'(2018) 등에서 소외된 사람의 이야기를 풀어낸 베이커 감독은 이번에도 약자를 이야기의 중심에 놓고 사회의 모순을 예리하게 포착한다.
‘탠저린’을 아이폰으로 찍었던 베이커 감독은 이번 작품을 35㎜ 필름으로 촬영해 영상에 고전적인 질감을 더했다. 실제로 눈앞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담는 듯한 촬영 방식으로 다큐멘터리의 느낌도 살렸다.
11월 6일 개봉. 139분. 청소년 관람 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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