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이영재 기자 = 1999년 2월 6일 새벽, 전북 완주군 삼례읍의 ‘나라슈퍼’라는 작은 가게에 3인조 강도가 침입했다.
이들은 가게 안에 있던 할머니를 포함한 세 명의 눈과 입을 테이프로 가리고 금품을 빼앗아 달아났다. 숨이 막힌 할머니는 목숨을 잃었다.
사건 직후 경찰은 19∼20세 남성 세 명을 범인으로 지목해 입건했지만, 이들은 진범이 아니었다. 수사 과정에서 폭행과 강요를 당한 이들이 허위 자백을 한 것이다.
각각 징역 3∼6년을 선고받고 만기 출소한 이들은 2015년 재심 사건 전문가인 박준영 변호사의 도움을 받아 재심을 청구했고, 이듬해 무죄를 선고받았다.
진범 한 명의 양심선언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경찰과 검찰이 얼마나 부실·조작 수사를 했는지도 드러났다.
한국 사회의 부조리를 영화로 조명해온 정지영 감독이 ‘삼례 나라슈퍼 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건을 한 편의 영화로 만들었다. 그의 신작 ‘소년들’이다. 이 영화에서 ‘나라슈퍼’는 ‘우리슈퍼’로 나온다.
‘소년들’은 실화를 토대로 하지만, 극적 효과를 위해 허구적 요소를 과감하게 도입했다. 경찰 내부에서 우리슈퍼 사건의 재수사를 밀어붙이는 주인공 황준철(설경구 분)의 존재가 대표적이다.
우리슈퍼 사건이 마무리된 지 1년이 지나 완주경찰서 수사반장으로 부임한 황준철은 한 통의 제보 전화를 받고 이 사건의 수사가 뭔가 잘못됐다는 걸 직감한다.
그는 사건을 처음부터 다시 들여다보지만, 얼마 못 가 난관에 부딪힌다. 부실·조작 수사로 무고한 소년 셋을 감옥에 보낸 경찰대 출신의 엘리트 최우성(유준상)이 사사건건 훼방을 놓는다.
이 영화는 황준철과 최우성을 내세워 경찰 내부의 대립 구도를 설정함으로써 수사 기관의 문제를 드러낸다.
황준철은 정의를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돈키호테와 같은 인물이다. 내적 갈등도 거의 없이 일관적이란 점에서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최우성은 권력 기관의 조직 논리를 대변한다. 그는 황준철에게 “조직에 똥칠하려고 작정한 게 아니라면 이쯤에서 그만하라”고 경고한다.
우리슈퍼 사건의 재심이 펼쳐지는 영화 후반부는 법정 영화의 성격을 띤다. 이곳에서 황준철과 최우성의 대립을 넘어서는 보다 근본적인 대립 구도가 드러난다.
법률 지식은 고사하고 글도 못 읽는 탓에 경찰의 강압 수사에 몰려 죄를 덮어쓸 수밖에 없었던 소년들과 재심에 증인으로 출석한 최우성의 법정 공방은 우리 사회의 약자와 강자의 대립을 보여준다.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소년들과 유려한 논변을 펼치는 최우성은 서로 딴 세상에 속한 사람들처럼 보인다. 결국 소년들이 울부짖음으로 마음속의 억울함을 터뜨려내면서 깊은 울림을 낳는다.
이 영화는 시간 순서를 따르지 않고 우리슈퍼 사건이 발생한 1999년과 황준철이 재수사를 시도하는 2000년, 좌천됐던 그가 다시 사건을 파헤치는 2016년을 뒤섞는다. 흐름을 놓치지 않으려면 어느 정도 주의가 필요하다.
자칫 무거운 분위기에 빠질 수 있는 이 영화에 경쾌한 기운을 부여하는 건 황준철을 믿고 따르는 후배 형사 박정규(허성태)와 황준철의 아내 김경미(염혜란)다.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게임’ 등을 통해 악역의 이미지가 강한 허성태는 이 영화에선 밝고 긍정적인 역할로 웃음을 자아내면서 반전 매력을 선보인다. 설경구와 염혜란의 티키타카도 코믹한 장면들을 만들어낸다.
올해로 데뷔 40주년을 맞은 정 감독은 6·25 전쟁을 배경으로 한 ‘남부군'(1990), 베트남 전쟁의 상처를 그린 ‘하얀 전쟁'(1992), 2007년 석궁 테러 사건을 소재로 한 ‘부러진 화살'(2012), 금융 범죄극 ‘블랙머니'(2019) 등 실화를 토대로 한 작품으로 한국 사회의 모순을 조명해왔다.
정 감독은 23일 ‘소년들’ 시사회에서 삼례 나라슈퍼 사건을 영화화한 데 대해 “우리에게 잘 알려진 사건들이라고 해도 대부분 강 건너 불 보듯 지나간다”며 “이 사건은 그래선 안 될 사건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는 스스로 약자의 편이라고 하면서 침묵을 지키고, 그 침묵을 이용해 힘 있는 자들은 약자를 힘들게 한다”며 “이것은 분명히 우리가 새겨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11월 1일 개봉. 123분. 15세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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