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싱가포르 첫 합작 영화…홍휘팡·정동환·강형석 주연
(서울=연합뉴스) 이영재 기자 = 림메이화(홍휘팡 분)는 싱가포르에 사는 쉰여덟 살의 중년 여성이다.
집안일을 하면서 가족만을 위해 살았다. 그러나 남편은 3년 전 세상을 떠났고, 하나밖에 없는 장성한 아들은 엄마에게 무심하다. 이쯤 되면 ‘내가 지금껏 뭘 위해 살았나’ 하는 생각이 들 만하다.
현실을 잊고 싶어서일까. 림메이화는 한국 드라마에 푹 빠져 산다. TV 앞에 앉아 다리를 긁으면서 드라마를 보는 모습은 영락없는 ‘아줌마’다.
싱가포르의 허슈밍 감독이 연출한 ‘아줌마’는 K-드라마 팬인 림메이화가 한국에 여행하러 와 예상치 못한 일을 겪으면서 성장하는 과정을 그린 로드 무비다.
림메이화는 K-드라마 촬영지를 둘러보는 패키지여행을 하러 한국에 도착하고, 한국 여행사에서 나온 가이드 권우(강형석)가 림메이화를 포함해 스무 명쯤 되는 관광객을 인솔한다.
권우는 중국어에 유창하긴 해도 일하는 방식이 어딘지 모르게 불안한 느낌을 준다. 결국 사고가 터져 림메이화는 한국 방문 첫날밤 서울 한복판에서 낙오되고 만다.
추운 겨울밤 거리에서 발을 동동 구르는 림메이화를 우연히 보게 된 아파트 경비원 정수(정동환)가 어떻게든 도와주려고 해보지만, 말이 안 통하는 게 문제다.
이 영화는 소재부터 한국 관객의 관심을 끌 만하다. 외국인의 눈에 비친 한국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다.
한국과 싱가포르의 첫 합작 영화로, 전체 분량의 80%를 한국에서 촬영했다. 한국의 관문인 인천국제공항부터 광화문, 숭례문, 창덕궁, 청계천, 남산 등 주요 관광지뿐 아니라 오래된 아파트와 주유소 등 우리에게 익숙한 생활 공간이 펼쳐진다.
고령에도 얼마 안 되는 임금을 받으며 야간 근무를 하는 아파트 경비원, 사채업자들의 독촉에 시달려 가족과 떨어져 살 수밖에 없는 가장, 고용이 불안정해 한 번의 실수로 해고돼 버리는 노동자 등 외국인이 접하기 어려운 한국 사회의 이면도 사실적으로 조명한다.
이 영화는 한국의 모습을 보여주는 걸 넘어 한국인이든 싱가포르인이든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보편적인 감정을 건드리면서 깊은 울림을 낳는다.
중년의 위기라는 말도 있지만,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듯한 느낌은 중년의 나이쯤 되면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누구나 겪을 수 있다.
그런 공허감 속에서 한국에 온 림메이화는 말 한마디 제대로 안 통하는 사람들의 도움을 받고, 그들의 고통을 들여다본다. 중국어를 할 줄 아는 권우와는 삶에 관해 터놓고 대화하기도 한다.
사람은 그렇게 서로의 고통에 공감하면서 친구가 돼주는 것만으로도 고통을 이겨낼 수 있는 건지도 모른다.
한국에 처음 온 싱가포르 중년 여성의 좌충우돌 모험을 그린 이 영화는 곳곳에서 웃음을 자아낸다. 말이 안 통하는 림메이화와 정수가 어설픈 영어로 대화를 이어가는 걸 보다 보면 웃음이 연발한다.
싱가포르의 국민 배우로 통하는 림메이화 역의 홍휘팡은 관객의 기억에 오래 남을 만한 연기를 펼친다. 악의 없고 따뜻한 그의 표정을 보면 누구나 마음속 깊은 곳에 간직한 어머니의 인상을 떠올릴 것 같다.
관록의 배우 정동환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외롭고 가난하면서도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어떻게 모른 척 할 수 있나”라고 말하는 정수의 모습은 관객의 마음을 훈훈하게 한다.
권우 역의 강형석은 힘겹게 살아가는 이 시대 청년의 고통을 대변하는 듯하다. 림메이화가 제일 좋아하는 한류 스타 여진구도 깜짝 출연한다.
이 영화의 영어 제목은 ‘Ajoomma’로, ‘아줌마’를 발음 그대로 옮겼다. 중국어 제목도 마찬가지다. 다만 중국어 제목은 중년 여성의 밝은 미래를 기원하는 뜻에서 ‘꽃길 아줌마’로 했다.
‘아줌마’는 허슈밍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그는 K-드라마의 열성적인 팬인 어머니를 보면서 이 영화를 구상했다고 한다.
영화 개봉을 앞두고 한국을 방문한 허 감독은 지난 16일 시사회에서 ‘아줌마’란 단어가 부정적으로 쓰인다는 말이 나오자 “이 영화를 보고 부정적 뉘앙스를 없앴으면 한다”며 “중년 여성들이 ‘그래, 나 아줌마야’라며 당당히 나아갈 수 있길 바란다”고 말했다.
‘아줌마’는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아시아의 떠오르는 신예 감독을 발굴하는 뉴 커런츠 부문에 초청됐다. 제8회 아시아 월드 영화제에선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29일 개봉. 90분. 12세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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