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래 “돈이 인간사 비극 90% 야기…우리 본성과 욕구 탐구”

4년 만의 장편 ‘황금종이’로 작품세계 3기 진입…”물욕이 인간 실체 밝히는 열쇠”

“운동권, 민주화 공헌했지만 권력욕에 변질…변하지 않는 마음 중요”

“마지막은 영혼과 내세 다룬 불교적 작품…등단 60주년 회문식 소망”

조정래 작가가 말하는 신작 ‘황금종이’
(서울=연합뉴스) 진연수 기자 = 소설가 조정래가 20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장편소설 ‘황금종이’ 출간기념 기자간담회에서 신작 소개를 하고 있다. 2023.11.20 jin90@yna.co.kr

(서울=연합뉴스) 이은정 기자 = “민족 역사의 현실과 모순, 갈등을 기록한 1·2기 작품에서 떠나 인간의 실존과 현실, 인간의 본성과 욕구를 탐구하고자 했습니다.”

등단 53주년을 맞은 조정래(80) 작가가 4년 만의 신작인 ‘황금종이'(전 2권, 해냄)를 출간하며 작품 세계 3기로 진입했다. 2019년 장편 ‘천년의 질문’ 이후 그는 매일 4~5시간씩 원고지에 써 내려가며 이 작품 집필에 매달렸다.

조 작가는 20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출간 간담회에서 “전반기가 단편과 중편을 쓴 시기라면, 중반기는 ‘태백산맥’과 ‘아리랑’, ‘한강’이 포함된다”며 “후반기에는 이 작품과 다음 작품까지 인간 본성과 존재의 문제를 다룰 것”이라고 말했다.

이 문제에 천착하고자 그는 인간 삶의 수단임에도 생살여탈권을 쥐게 된 ‘돈’에 주목했다. 그는 돈은 가난하던 대학 시절부터 평생을 생각해온 문제라고 했다. 제목의 ‘황금종이’는 돈을 상징적으로 비유한 표현이다.

조 작가는 “인간의 다섯 가지 욕구(물욕, 성욕, 식욕, 명예욕, 수면욕) 중 맨 앞에 나오는 재물욕이 인간의 실존적인 실체를 밝히는 열쇠라고 생각했다”며 “인간사 비극의 80~90%가 돈 때문에 야기되는 문제이다. 돈이 인간을 어떻게 구속하고 지배하는가, 인간은 어떻게 해서 돈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가 하는 문제를 소설로 쓰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사회주의 몰락 이후 자본주의가 이데올로기가 되면서 돈은 그 힘이 더 막강해졌다”며 “우리의 본능을 훨씬 뛰어넘는 무서운 야수적인 힘을 갖고 우리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인간은 문명과 문화를 창출해냈는데 욕구가 작용하면서 파탄에 이르는 이중성을 지니게 됐다. 시대를 초월해서 그 역할을 해 온 것이 돈”이라고 꼬집었다.

원고지 약 1천800매 분량인 ‘황금종이’는 ‘돈 중독’에 빠진 인간 군상의 비극을 통해 병리적인 세태를 고발하고 인간 본성의 회복을 갈구하는 작품이다.

촉망받는 신임 검사였으나 재벌 비리 의혹을 제기하다가 법복을 벗은 이태하 변호사가 돈에 얽힌 각종 사건을 맡으며 전개되는 옴니버스 형식의 소설이다.

소설 속 에피소드는 우리가 뉴스에서 흔히 접한 현실의 비정한 사건과 별반 다르지 않다.

죽은 아버지가 어머니 몫으로 남긴 유산을 빼앗으려는 딸, 동등하게 유산을 받으려는 딸들과 더 많이 가지려는 아들들의 난타전, 월세를 4배 인상한다고 엄포를 놓는 건물주를 둔기로 폭행해 구속된 식당 주인, 로또에 빠져 어머니의 유산을 날리고 목숨을 끊은 가장….

“돈 앞에 장사 없다”, “돈이 웬수야”란 말처럼 돈 앞에선 우애도, 우정도, 인권도, 목숨도, 인간의 존엄을 지탱하는 가치가 무참히 짓밟힌다.

조 작가는 ‘작가의말’과 소설 마지막 소제목을 통해 두 가지 퀴즈를 냈는데 모두 답은 ‘돈’이라며 “돈에서 자유로울 사람은 없지만 욕구가 커져 탐욕에 이르면 인간은 몰락한다. 종교도 실패한 일인데, 내가 이렇게 쓴들 얼마나 효과가 있을까 싶지만 실패가 두려워 놔둘 순 없었다”고 말했다.

조정래 작가, 신작 ‘황금종이’ 출간
(서울=연합뉴스) 진연수 기자 = 소설가 조정래가 20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장편소설 ‘황금종이’ 출간기념 기자간담회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2023.11.20 jin90@yna.co.kr

그는 이 작품에서 바람직하게 사는 삶을 통해 소설적 구원을 제시하고자 두 명의 인물을 창조했다. 대학시절 운동권 선후배인 이태하 변호사와 정신적 멘토인 선배 한지섭이다. 민변에 소속된 이 변호사는 돈에 얽힌 재판을 통해 돈의 의미를 묻는 역할을 한다.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정계에 입문하지만 권력에 야합하는 운동권의 모습에 귀농한 한지섭은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그려진다.

조 작가는 “이 둘을 통해 독자들에게 삶의 탈출구를 제시하고 싶었을 뿐 특별한 모델은 없다”며 “둘이 운동권 출신인 것은 오늘의 민주화를 이룬 공헌이 있어서다. 물론 그들이 변절하고 문제가 많지만 그런 정신을 최소한 간직하는 것이 인간으로서의 노력이 아닐까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그는 변하지 않은 상태인 ‘항정'(恒定)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소설에서 언급했듯이) 그들이 운동했을 때의 처녀성을 지니고 단결해서 40~50명의 국회의원을 만들어냈다면 그야말로 국민을 위한 세상이 됐을 것”이라며 “자기 욕심을 차리는 권력욕 때문에 변질돼서 그 존재가 희미해지고 매도의 대상이 됐다. 변하지 않는 마음을 갖는 것이 중요한데 교육자도, 종교인도, 정치인도 그 항정이 없어 이익 앞에서 흔들려버린다. 그것이 인생의 가장 보편적인 현실일지도 모르겠다”고 덧붙였다.

그는 소설에서 특정 정권을 향한 듯한 비판과 법조계의 전관예우, 자연을 파괴한 개발 등의 문제를 꼬집기도 한다.

그는 “뼛속까지 쓸려버린 우리 사회의 모순과 문제점을 작가로서 최소한이라도 막아야 한다”며 “에밀 졸라가 걸어간 작가의 사명을 가고자 하는 것”이라고 갈음했다.

조정래는 ’20세기 한국 현대사 3부작’으로 불리는 대하소설 ‘태백산맥’과 ‘아리랑’, ‘한강’을 비롯해 ‘정글만리’, ‘인간 연습’ 등을 집필하며 반세기 동안 성실한 필력을 보여줬다.

조 작가는 작가로서 늘 첫 마음으로 평생을 지내왔다면서 “흔들릴 때마다 채찍을 가하며 지켜왔다. ‘태백산맥’을 쓰며 술을 완전히 끊어 지금은 술을 먹지 못한다. 단시간에 빨리 긴박감을 유지하며 쓰고자 한 것”이라고 떠올렸다.

이번 작품을 쓰면서 “육신은 늙어가는데 머리는 명료하다는데 감사했다”는 그는 작가로서의 마지막 길을 정리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인생 마지막 작품은 우리 영혼의 문제와 내세를 다루는, 불교적 세계관을 가진 작품이 될 것”이라며 “이를 통해 문학 인생을 마칠까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두 가지 소망은 아내 김초혜 시인과 결혼 60주년을 맞아 회혼식을 하는 것, 등단 60주년 마지막 작품집을 내면서 회문식을 하는 것”이라며 “환생이 있다면 다시 태어나도 작가가 되고 싶다. 60년간 쓰고 간다고 한들 내가 바라는 세상은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노력하다가 죽는 게 작가”라고 했다.

mimi@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