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오보람 기자 = 평범한 직장인이라면 거액의 복권에 당첨되는 상상을 한 번쯤은 해봤을 법하다.
똘똘한 아파트 한 채를 장만하고 가족을 건사하는 완벽한 계획도 세워 본다. 몇 년 만에 당첨금을 모두 날렸다는 사람의 사연을 들으면 그렇게 한심할 수가 없다.
마이클 모리스 감독의 영화 ‘레슬리에게’의 주인공 레슬리(앤드리아 라이즈보로 분)도 비슷한 사연을 지닌 여자다.
젊은 시절 홀로 어린 아들을 키우던 그는 복권에 당첨됐다. 레슬리는 뉴스 카메라 앞에 서서 당첨금으로 집을 사고 아들에게 좋은 것은 다 해주겠노라 선언한다. 그의 다짐은 실현됐을까.
6년이 흐른 뒤 레슬리는 노숙자나 다름없는 모습으로 변해 있다. 돈이 생기면 술부터 사 마시는 그는 월세가 밀려 살던 곳에서 쫓겨난 신세다. 결국 캐리어 하나만 끌고 오랫동안 떨어져 있던 아들 제임스(오언 티그)의 집을 찾는다.
레슬리는 아들 곁에 머무르면서도 술병을 놓지 못한다. 제임스는 엄마가 룸메이트에게서 훔친 돈으로 술을 마셨다는 사실을 알고서 폭발한다.
레슬리의 다음 행선지는 그토록 가기 싫었던 고향이다. 이곳에서도 그는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다. 모두가 그를 두고 술과 파티, 대마초에 미쳐 복권 당첨금을 날린 바보라고 손가락질해댄다. 절친했던 친구 낸시(앨리슨 재니)와도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됐다.
모텔 직원인 중년 남자 스위니(마크 마론)만은 예외다. 그는 레슬리와 일면식도 없는 사이지만 일자리를 주는 호의를 베푼다. 모텔 사장이자 스위니의 친구 로열(앤드레 로요)은 처음엔 레슬리를 못마땅해하지만, 점차 마음을 연다.
레슬리는 복권에 당첨됐을 때처럼 새 사람으로 태어나겠다고 결심한다. 그러나 이웃의 혐오를 극복하고 알코올 중독과 싸워 이겨내는 일이 쉽지만은 않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발길은 술집을 향하고 있다.
스스로 한 약속을 자꾸만 깨는 레슬리의 모습은 관객의 가슴을 갑갑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를 마냥 한심스럽게 볼 수만은 없다. 누구나 인생을 살다 보면 가끔 잘못된 선택을 하고, 같은 실수를 반복할 때도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행운을 행복으로 치환하는 데 실패한 여자가 어떻게 다시 행복에 다가가는지에 눈을 맞췄다.
그 과정에 필요한 것은 어마어마한 돈이 아니라 나를 믿어주는 사람이라고 영화는 말한다. 조건 없는 선의를 보여준 스위니, 레슬리를 믿고 참아 준 로열, 당신은 좋은 사람이라고 말해준 낯선 남자 덕분에 새 인생을 살아갈 힘을 얻는 레슬리를 보여주면서다.
이 영화가 설득력 있게 다가오는 데에는 레슬리를 연기한 라이즈보로의 공이 크다. 레슬리 그 자체처럼 보이는 그는 한 알코올중독자의 갱생기라는 자칫 평범할 수 있는 이야기에 관객이 끝까지 집중할 수 있도록 만든다.
라이즈보로는 올해 열린 미국 아카데미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할리우드 대표 여성 배우 케이트 윈즐릿은 “내가 스크린에서 본 가장 뛰어난 여배우의 연기”라는 극찬을 남기기도 했다.
29일 개봉. 120분. 15세 이상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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