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도서관, ‘우리책의 장정과 장정가들’ 전시
70년 표지화 변천사 한눈에…신소설·문예지 등 90여 종 눈길
(서울=연합뉴스) 김예나 기자 = ‘번번이 약속 기일을 넘기는 것도 성의가 없어서가 아니라 재미난 생각이 안 나고 잘되지 않아서이다.’ (문예지 ‘현대문학’ 1963년 4월 호)
수화(樹話) 김환기(1913∼1974)는 ‘표지화 여담’이란 글에서 이같이 털어놨다.
그는 생전 회화뿐 아니라 평소 친분이 있던 문인들의 작품집이나 월간지, 단행본 표지와 삽화를 그렸는데 ‘여남은 장 그려서 한두 장 골라내면 좋은 편’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계용묵의 단편소설 ‘별을 헨다'(1949년)부터 황순원의 ‘학'(1956),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1955년) 등 표지화에서도 자신만의 화풍을 드러냈다.
추상 미술의 거장 김환기의 예술세계를 책 표지로 표현한 셈이다.
우리 미술사에 한 획을 그은 유명 화가들을 장정(裝幀.표지화)으로 만나볼 수 있는 전시가 경기 성남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도서관에서 열리고 있다.
도서관이 전북 완주책박물관과 함께 최근 선보인 ‘우리책의 장정과 장정가들’은 책의 겉장이나 면 등을 꾸미는 그림, 디자인 등을 일컫는 장정에 주목한 전시다.
1883년 국내에 신식 인쇄술이 도입된 이후 1960년대에 이르기까지 약 70년의 인쇄·출판 표지 장정의 변천 과정과 역사를 90여 종의 책으로 풀어냈다.
전시는 서화가 관재(貫齋) 이도영을 소개하며 시작된다.
전통 회화뿐 아니라 시사만평, 미술 교과서 제작 등 다양한 활동을 했던 그는 신소설 ‘구마검’, ‘옥호기연’, ‘옥중화’ 등 다양한 책 표지를 그렸다.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 춘곡(春谷) 고희동이 그린 표지화도 눈여겨볼 만하다.
그는 1914년 발간된 대중계몽잡지인 ‘청춘’, 1926년 최남선이 지리산을 중심으로 곳곳을 순례한 뒤 쓴 견문록 ‘심춘순례’ 등의 표지를 그린 바 있다.
연구원 관계자는 “시대가 변하면서 전통 산수화를 그렸던 화가들도 근대 화가로 나아가는데 이도영, 고희동을 주축으로 근대 장정이 시작되는 점을 주목할 만하다”고 말했다.
전시는 근대 시기 문인과 화가의 만남도 비중 있게 다룬다.
시인이자 소설가, 건축가로 활동했던 이상과 1930년대 한국 표현주의 미술을 대표하는 작가인 구본웅은 이상이 요절할 때까지 친우로 함께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김환기, 천경자, 이중섭 등 근현대 미술사를 장식한 화가들의 장정도 볼 수 있다.
특히 김환기가 그린 문예지 ‘현대문학’ 표지는 단순한 선과 색채, 상징 등이 표현돼 각호를 비교해볼 만하다. 이중섭이 표지를 장정한 장편 동화 ‘모래알고금’도 만날 수 있다.
도서관은 “근현대 인쇄 미술의 예술성을 엿볼 수 있는 전시”라며 “문학가와 미술가의 애정 어린 손길이 배어있는 책 장정을 통해 그들의 열정을 만나보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전시는 내년 2월 23일까지 도서관 로비 1층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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