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로 보는 세상] 변신과 욕망

(서울=연합뉴스) 도광환 기자 = ‘변신’은 인간 소망 중 하나다.

민담과 우화 등 옛이야기에 변신 이야기가 흔하지만, 무엇보다 변신 이야기의 보고(寶庫)는, 신화다.

변신을 통해 이룰 수 없는 일을 성취할 수 있다는 욕망이 투사(投射)된 결과인데, 서양 문화 원천인 그리스·로마 신화는 넓게 보면 변신에 관한 이야기다.

로마시인 오비디우스(BC 43~AD 17)가 쓴 신화 해석도 ‘변신 이야기(Metamorphoses)’로 이름 지었다.

도서 ‘변신 이야기’ 표지
민음사 출판

신화에서 ‘변신의 왕’은 ‘신들의 왕’인 제우스다. 황소로 변하고, 백조로 변하며, 안개로도 몸을 바꾼다. 모두 여성을 유혹하기 위한 변신이었다는 점에서 ‘멈추기 어려운 이성에 대한 욕망’을 상징한다.

제우스 변신 중 제일 인상 깊은 건 비(雨), 그것도 황금비로 변신하는 이야기다.

다나에는 아르고스의 왕 아크리시오스의 딸이다. 아크리시오스는 딸인 다나에가 낳은 손자에게 피살될 것이라는 신탁을 듣는다. 아크로시오스는 다나에를 아무도 접근할 수 없는 청동 탑에 가둔다. ‘바람둥이’ 제우스가 천하의 미모 소유자인 다나에를 모르는 체할 리 없다. 황금비로 변신해 그녀에게 접근해 사랑을 나눈다.

다나에가 임신해 낳은 아들이 괴물 메두사 목을 베는 영웅, 페르세우스다.

신, 미녀, 청동 탑, 황금비. 화가들이 외면할 수 없는 여러 요소를 갖췄다. 눈에 띄는 세 작품을 보자.

티치아노가 그린 ‘다나에’
프라도 미술관 소장

티치아노는 색채의 일인자답게 눈부시게 채색하며, 황금비를 금화로 그렸다. (1554) 황금비를 바라보는 다나에 표정은 당혹이나 놀람보다는 기다림이나 유혹 같다.

나이 든 하녀는 동전을 담기 여념이 없다. 르네상스 시기 돈에 대한 열망이 커지던 시대 반영이라고 본다.

두 가지 버전으로 그렸는데, 다른 그림에는 하녀 대신 천사가 있다.

렘브란트가 그린 ‘다나에’
예르미타시 박물관 소장

렘브란트가 그린 다나에 표정엔 당혹감이 앞서 있다. (1636~1643) 한 손을 든 자세가 놀람의 느낌을 보태준다. 다만 비도 없고 금화도 없다. 다나에와 하녀의 시선을 볼 때, 커튼 너머로 제우스가 막 등장한 것 같다. 상상력을 발동시키는 작품이다.

클림트가 그린 ‘다나에’
비엔나 뷔르틀레 미술관 소장

클림트가 그린 다나에는 한 번 보면 잊히지 않는다. (1908) 다른 그림과 헷갈리지도 않는다. 클림트답게 무척 관능적으로 그렸다.

허벅지와 엉덩이, 유두가 강조된 다나에는 잔뜩 쏟아진 금화를 품고 있다. 눈을 감은 표정은 성적 황홀을 연상시킨다.

다나에가 제우스(금화)를 품은 건지, 제우스가 다나에를 안았는지 알기 어렵게 표현했다. 클림트가 성숙시킨 ‘표현주의’ 양식으로 신화와 관능을 미묘하게 결합했다.

신화는 욕망에 관한 이야기다. 사랑과 질투, 권력, 명예 등을 두고 벌이는 갈등과 대결이 신화의 줄기다.

욕망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인간은 욕망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하지만 현실에선 변신할 수 없는 인간이기에 욕망은 장애가 된다. 불교에선 번뇌의 근원으로 바라봤다.

끊을 수 없다면, 받아들여야 한다. 대신 나뿐 아니라 타인의 욕망도 인정해야 한다. 개인과 개인, 집단과 집단이 서로의 욕망을 ‘응시’할 수 있을 때 균형 있는 교류와 조절이 가능하다.

그런데 아무래도 제우스는 너무 나갔다. 오직 자신의 욕망만이 앞섰다.

부럽다고? 그럼, 교류와 조절은 요원하다. 신화를 통해 미화됐을 뿐 그건 가장 원초적인 폭력이다.

dohh@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