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게 변한 백지에 관객들 박수…한국 미술 특별전 기간 마지막 퍼포먼스
(뉴욕=연합뉴스) 고일환 특파원 = 1일(현지시간) 오후 미국 뉴욕의 구겐하임 미술관 2층 갤러리에선 레바논계 미국 시인 에텔 아드난의 시집 ‘서지'(Surge)가 낭독됐다.
마이크 앞에 선 여성은 시를 읽은 뒤 해당 페이지를 찢어 옆에 앉은 남성에게 건넸다.
이 남성은 찢어진 페이지 위에 담긴 시의 내용을 목탄으로 흰 종이에 써 내려갔다. 남성은 내용을 모두 옮긴 뒤 찢어진 페이지를 구겨 던져버렸다.
시간이 지나면서 남성 앞의 흰 종이는 빈공간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검은 선으로 빽빽하게 채워졌다. 20페이지에 달하는 시 내용을 종이 한 장 위에 겹쳐서 썼기 때문이다.
반대로 시집은 표지를 제외하고 거의 모든 페이지가 찢겨나갔다.
2층 갤러리를 채운 관객들은 종이에 더 이상 채울 빈공간이 사라지면서 시낭독이 종료되고, 목탄을 든 남성이 자리를 떠나자 그제야 박수를 보냈다.
30여분간 진행된 이 퍼포먼스는 한국 실험미술계의 원로 김구림(87) 작가의 퍼포먼스 ‘생성에서 소멸로’를 재현한 것이다.
내년 1월까지 ‘한국 실험미술 1960-70년대’라는 특별전을 열고 있는 구겐하임미술관은 앞서 한국 실험미술의 선구자로 불리는 이건용(81)과 성능경(79) 작가의 퍼포먼스도 소개했다.
김 작가의 ‘생성에서 소멸로’는 구겐하임 미술관이 이번 전시 기간에 준비한 한국작가의 마지막 퍼포먼스다.
이 작품은 시를 읽고 이를 종이에 적는 행위는 ‘생성’을, 찢어버린 시집과 까맣게 변한 흰 종이는 ‘소멸’을 의미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국립현대미술관과 함께 이번 전시회를 공동 기획한 안휘경 구겐하임 어소시에이트 큐레이터는 “김 작가의 ‘생성에서 소멸로’는 많은 의미를 담은 아름다운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앞서 서울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지난 6월 이 작품이 재현됐을 때에는 한국 여성 연극배우가 윤동주와 김소월 시인 등 한국 시인들의 시를 낭독했다.
그러나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이 김 작가의 퍼포먼스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미국 관객들을 위해 오랜 기간 미국에서 거주한 프랑스·캄보디아계 무용가가 영어 시집을 읽는 것으로 형식이 변경됐다.
김 작가는 지난 6월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휠체어를 타고 퍼포먼스를 지켜봤지만, 뉴욕 퍼포먼스는 참석하지 못했다.
김 작가는 비디오아트와 설치, 판화, 퍼포먼스, 회화 등 매체와 장르, 주제를 자유롭게 넘나든 원로작가다.
특히 미술뿐 아니라 무용, 연극, 영화, 음악에 이르기까지 전방위에서 활동한 ‘총체 예술가’로도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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