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가 아주 힘든 해…비행기 타고 오신 분도 있는데, 그래도 해야죠”
EDM 축제 방불 화려한 레이저쇼 ‘압도’…2시간 걸쳐 록·민요·트로트 넘나들어
(서울=연합뉴스) 이태수 기자 = “오늘 제가 하기 힘든 노래일 텐데요. 그래도 있는 힘 다 합쳐서 해 보겠습니다.”
‘가왕'(歌王) 조용필은 지난 9일 서울 올림픽공원 KSPO돔(체조경기장)에서 열린 ‘2023 조용필&위대한탄생 투어 콘서트 – 서울’ 공연에서 ‘한오백년’을 부르기에 앞서 이같이 말했다.
지난 2일 광주 콘서트 이후 감기에 걸렸다는 그의 말투에는 비장함마저 서려 있었다.
민요풍 노래에 잘 어울리는 커다란 흰 천이 천장에서 ‘휘리릭’ 내려오고, 조용필이 “한많은 이세상 야속한 님아” 하고 한음 한음을 혼신의 힘으로 토해내자 1만 관객은 숨도 죽인 채 이를 지켜봤다.
이번 콘서트는 조용필이 서울에서는 지난 5월 잠실주경기장 이후 7개월 만에 여는 자리였다.
같은 해 국내 최대 규모 공연장인 잠실주경기장과 ‘K팝의 성지’로 불리는 KSPO돔에서 잇따라 단독 콘서트를 여는 것은 인기 K팝 아이돌 그룹에도 쉽지 않은 일이다. 더욱이 감기로 컨디션 난조를 겪으면서도 100% 라이브로 2시간 공연을 홀로 이끌어간 것은 그야말로 ‘가왕’이기에 가능해 보였다. 그리고 그를 이렇게 무대로 이끈 것은 뮤지션으로서의 사명감 혹은 오랜 팬들을 보고자 하는 의지 때문인 듯했다.
조용필은 “저는 올해가 아주 힘든 해였다”면서도 올해가 데뷔 55주년이라는 점을 의식한 듯 “내가 아직 55살이거든. 아직 젊다. 올해가 앞으로 한 20일 남았는데, 아주 좋은 일만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제가 참 오랫동안 노래했죠. 70년대, 80년대, 90년대, 2000년대, 2010년대, 2020년대…. 아이고, 여기 있는 사람 가운데 일부는 태어나기도 전이네요.”
조용필은 또한 “(목 상태가 좋지 않아) 주치의가 공연하면 절대로 안 된다고 했다”면서도 “그래도 해야죠. 미국, 영국, 일본 여러 곳에서 비행기 타고 오신 분들도 많이 있다”고 무대에 대한 의지를 드러냈다.
조용필은 “제가 노래하는데 자꾸 기침이 나와서 하기가 어려울 때도 있을 텐데, 그럴 때 여러분이 ‘싹’ 노래를 불러달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그는 실제로 이날 노래 도중 마이크를 객석으로 돌려 관객과 호흡하는 모습도 보였다. ‘원조 오빠부대’는 이에 호응해 자리에서 일어나 덩실덩실 춤을 추며 장내가 떠나갈 듯한 떼창으로 화답했다.
공연이 열린 KSPO돔에는 거대한 일(一)자형 무대와 LED 전광판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장내가 암전되자 관객의 열띤 함성과 함께 조용필과 그의 밴드 위대한탄생이 무대에 올랐다.
조용필은 트레이드 마크인 선글라스에 오렌지색과 베이지색이 어우러진 세련된 셔츠 차림으로 등장했다. 그는 직접 기타를 치며 ‘장미꽃 불을 켜요’로 공연의 포문을 열었다.
조용필은 ‘못찾겠다 꾀꼬리’, ‘바람의 노래’, ‘자존심’ 같은 명곡을 잇달아 들려줬고, ‘창밖의 여자’나 ‘돌아와요 부산항에’ 같은 초기 히트곡도 불려줘 팬들을 기쁘게 했다.
그는 어깨를 ‘들썩’하며 온몸에 힘을 줘 가며 고음을 냈고, 때로는 허리를 뒤로 젖히거나 앞으로 숙여가며 노래에 집중했다.
공연 후반부로 갈수록 ‘고추잠자리’, ‘태양의 눈’, ‘여행을 떠나요’ 등으로 강렬한 록 분위기가 더해졌다. 관객 대부분은 아예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흔들어가며 우렁찬 떼창으로 가왕과 ‘함께’ 콘서트를 완성해갔다. 어느 남성 관객은 마치 노래방에 온 듯 공식 응원봉을 마이크처럼 부여잡고 노래를 따라 불렀다.
이날 무엇보다 좌중을 압도한 것은 거대한 LED 전광판과 조명 장치에서 뿜어내는 화려한 영상과 레이저쇼였다. 콘서트장은 마치 EDM(일렉트로닉 댄스 뮤직) 페스티벌이나 미디어 파사드를 방불케 하는 시각적 볼거리를 쏟아냈다.
지난해 11월 발매된 ‘세렝게티처럼’ 무대에서 ‘여기 펼쳐진∼ 세렝게티처럼∼ 넓은 세상에∼’ 하는 하이라이트 부분에서는 장내가 순식간에 암전되고 초록색 레이저가 뿜어져 나와 광활한 초원에 온 듯한 느낌을 줬다.
또 2013년 전국을 들썩이게 만든 히트곡 ‘바운스'(BOUNCE) 무대에서는 세련된 파스텔톤 3D 알파벳 애니메이션이 춤을 췄고, ‘고추잠자리’ 후렴구에서는 제목을 연상케 하는 시뻘건 레이저 조명이 무대 반대편 객석을 휘저었다.
조용필은 민요(‘한오백년’), 팝 록(‘세렝게티처럼’), 트로트(‘돌아와요 부산항에’), 오페라 록(‘태양의 눈’)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든 자신의 55년 음악 여정을 약 2시간에 걸쳐 풀어냈다.
그가 ‘바람의 노래’를 부를 때는 악조건 아래에서도 팬과의 약속을 지켜내는 모습이 노랫말과 겹치며 뭉클한 감동을 선사했다.
‘보다 많은 실패와 고뇌의 시간이 비켜 갈 수 없다는 걸 / 우린 깨달아야되 / 이제 그 해답이 사랑이라면 / 나는 이 세상 모든 것들을 사랑하겠네.’
이날 공연장은 가왕을 보기 위해 몰려든 ‘오빠부대’로 공연 시간 수 시간 전부터 북적였다. 팬들은 ‘오빠!’, ‘오빠는 나의 빛’, ‘땡큐 조용필’ 등이 적힌 피켓을 들고 설렌 표정으로 공연장에 입장했다. 입구 근처에 마련된 조용필 등신대에는 기념사진을 촬영하려는 팬들로 긴 줄이 생겨나기도 했다.
조용필 팬클럽 ‘이터널리’의 남상옥(55) 회장은 “오빠가 음악을 내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며 “조용필 오빠는 늘 기대를 웃도는, 새롭고 앞서가는 음악을 내놓는다. 내년에 나올 정규 20집도 많이 기대돼 믿고 기다리는 중”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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