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최후 결전 노량대첩 그려…김한민 감독 삼부작 마무리
(서울=연합뉴스) 이영재 기자 = 우리 역사에서 충무공 이순신(1545∼1598)만큼 영웅 서사에 부합하는 인물이 또 있을까.
나라가 존망의 갈림길에 몰린 임진왜란 때 백성에게 희망을 준 옥포대첩, 한산대첩, 명량대첩, 노량대첩 등 그의 빛나는 무공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이순신 장군의 죽음은 영웅 서사를 완결하는 마침표처럼 보인다. 평생 충의(忠義)를 좇았던 그는 노량대첩 때 패퇴하는 왜군을 추격하다가 총탄에 맞아 전사함으로써 자기를 오롯이 역사의 제단에 바쳤다.
그의 장렬한 최후를 그린 영화가 나왔다. 김한민 감독이 연출한 이순신 삼부작의 마지막 편 ‘노량: 죽음의 바다'(이하 ‘노량’)다.
이순신의 영웅 서사를 완결하는 이 작품은 김 감독의 ‘명량'(2014)과 ‘한산: 용의 출현'(2022)을 잇는 ‘화룡점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영화는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598년 숨을 거두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의 유언에 따라 왜군은 조선에서 철수하려고 하지만, 이순신(김윤석 분)이 제해권을 쥐고 있어 남해안에 발이 묶인다.
이순신과 명나라 장수 진린(정재영)이 이끄는 조·명 연합 수군의 봉쇄로 궁지에 몰린 왜장 고니시(이무생)는 진린에게 밀사를 보내 뇌물 공세를 해가며 타협책을 모색한다.
왜군과의 정면 대결을 피하고 싶은 진린은 왜군에게 퇴로를 열어주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지만, 이순신의 반대에 부딪힌다.
이순신은 “절대 이대로 원수를 돌려보낼 수 없다”고 주장한다. 왜군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이순신은 적에 대해 어떤 환상도 갖지 않는다.
이 영화엔 ‘끝’이란 말이 자주 나온다. 이순신은 임진왜란의 막바지에서 이 전쟁을 어떻게 끝낼지 고뇌한다. 역사의 소용돌이 한복판에 선 영웅의 역사적 성찰이라고 할 수 있다.
진린은 ‘좋은 게 좋은 것’이란 식으로 전쟁을 끝내려고 하지만, 이순신은 “이렇게 적을 살려 보내면 이 전쟁을 올바로 끝낼 수 없다”고 일갈한다.
이순신의 마음엔 왜군의 침략으로 목숨을 잃은 숱한 백성과 전우들이 있다. 최후 결전의 바다로 가는 배에서 이순신은 전사한 전우들의 명단을 묵묵히 본다.
전쟁을 어떻게 끝내야 하느냐는 이순신의 고민에는 자기 삶을 어떻게 끝낼 것이냐는 고민도 녹아 있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는 노량대첩에서 영웅에게 어울리는 죽음을 맞는다.
노량대첩을 앞둔 조선과 명나라 수군, 왜군 지휘부의 이야기로 한 시간을 채운 이 영화는 나머지 전부를 노량대첩에 할애한다. 전투 장면만 한 시간 반에 달한다.
동틀 무렵의 일부 전투 장면을 제외하면 대부분 어두운 밤의 해상전을 그렸다. ‘한산’과는 달리 육상 전투 장면도 볼 수 없다.
시커먼 밤하늘을 가르는 불화살, 포격을 당해 불타는 판옥선, 해무에 가려 얼마나 많은지 가늠하기 어려운 함대 등이 ‘명량’과 ‘한산’에선 볼 수 없었던 독특한 스펙터클을 만들어낸다.
선상에서 벌어지는 백병전을 묘사하는 데도 상당한 공을 들인 느낌이다. 주로 높은 곳에서 백병전을 내려다보던 카메라는 갑자기 그 속으로 들어간다.
칼과 칼이 부딪치고,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조총이 불을 뿜는다. 관객은 이순신을 따르는 조선 수군이 돼 노량대첩에 참여하고 있는 듯한 느낌에 빠져든다.
전투 장면이 꽤 긴 만큼 중간에 살짝 늘어지는 듯한 느낌도 없지 않다. 전투를 앞둔 이순신과 진린, 고니시의 이야기도 비슷한 느낌을 줄 수 있다.
그만큼 역사적 사실에 충실하기 위해 노력한 결과가 아닌가 한다. 김한민 감독이 이 영화를 위령 음악인 레퀴엠에 비유했듯, 작품 전반에 무거운 분위기가 흐른다.
이순신이 최후를 맞는 장면은 영화적 상상력으로 지어낸 것이지만, 감동적이다. 관객의 입장에선 이 영화의 도움으로 이순신의 마지막 순간을 구체적으로 상상해볼 수 있는 셈이다. 신파에 빠질 가능성을 의식한 듯 감정을 절제한 부분도 돋보인다.
‘명량’의 최민식이 열두 척의 배로 대군에 맞선 용장(勇將) 이순신을, ‘한산’의 박해일이 왜군을 학익진에 가둬 일거에 수장시켜버린 지장(智將) 이순신을 연기했다면, 김윤석은 전쟁의 막바지에 백성의 고통을 가슴에 품은 현장(賢將) 이순신을 연기했다. 김윤석은 고뇌에 찬 영웅의 얼굴을 스크린에 재현해낸다.
김 감독은 이번 작품으로 약 10년에 걸친 이순신 삼부작 프로젝트를 완성했다. ‘명량’은 국내 개봉작으로는 역대 최대인 1천761만명의 관객을 모았고, ‘한산’은 726만명이 관람했다.
김성수 감독의 ‘서울의 봄’으로 모처럼 활기가 도는 올겨울 극장가에서 ‘노량’이 얼마나 많은 관객을 모을지 주목된다.
20일 개봉. 152분. 12세 관람가.
ljglory@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