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오보람 기자 = 무한 소수 0.9는 정수 1과 같을까 다를까.
일케르 카탁 감독의 독일 영화 ‘티처스 라운지’는 까다로운 수학 문제로 시작한다.
신임 교사 카를라(레오니 베네슈 분)가 낸 이 문제를 듣고 한 아이는 두 숫자가 엄연히 다르다고 대답한다. 다른 친구들도 고개를 끄떡인다.
카를라는 아이들에게 단지 추측인 건지, 아니면 증명할 수 있는지를 묻는다. 대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때 반에서 가장 똑똑한 오스카가 칠판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오더니 풀이를 통해 두 숫자는 같다는 걸 증명해낸다. 카를라는 이렇듯 입증할 수 있는 사실이어야 진실이 된다며 오스카를 칭찬한다.
하지만 정작 카를라 자신은 추측과 증명 사이 난해한 늪에 빠지는 바람에 큰 실수를 저지른다.
학교에서 일어난 연쇄 절도 사건의 범인이 교사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 그는 노트북으로 몰래 교무실 모습을 동영상으로 촬영한다. 영상에는 누군가의 팔이 카를라 재킷 근처로 왔다 갔다 하는 게 찍혀 있다.
카를라는 영상 속 인물의 복장을 근거로 오스카의 어머니이자 동료 교사 쿤(에바 뢰바우)이 돈을 훔쳐 간 게 분명하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교장과 카를라 앞에선 쿤의 당당한 태도는 어쩌면 그가 범인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조그만 가능성을 심어준다.
같은 옷을 입은 사람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고, 자기 얼굴이 영상에 나온 것도 아니라는 쿤의 항변은 일견 타당해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장은 0.0…1%의 가능성을 배제한 채 쿤을 학교에서 내보낸다.
작은 학교에서 벌어진 이 사건의 후폭풍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동료 교사들은 어떻게 자기들을 의심해 불법으로 영상을 찍을 수 있냐며 배신감을 느끼고, 아이들은 오스카를 괴롭히는 쪽과 더는 카를라를 믿지 않겠다는 쪽으로 갈린다. 급기야 학부모들도 몰려와 진실을 말하라고 카를라를 몰아붙인다.
영화는 속도감 넘치는 전개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스토리 덕분에 스릴러 못지않은 서스펜스를 자아낸다.
선생님을 무시하는 버릇없는 학생과 학교 일에 지나치게 간섭하는 듯한 학부모라는 설정으로 인해 교권 추락 문제도 잠시 짚어보게 된다.
하지만 ‘티처스 라운지’는 단순히 교권에 관해 이야기하는 작품은 아니다.
그보다는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인 학교에서 소통과 신뢰가 부재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데 집중한다. 갈수록 단절되고 서로에 대한 믿음은 옅어지는 우리 사회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카를라를 비롯한 교사, 학생, 학부모 등 등장인물 중 악한 사람은 한 명도 없다. 그런데도 비극은 꼬리에 꼬리를 물듯 쌓이고 결국엔 모두가 상처받는다.
만약 카를라가 동료들을 조금만 믿었다면, 교사들이 학부모들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해줬더라면, 아이들이 지레짐작하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들이다.
제73회 베를린국제영화제 초청작인 이 영화는 독일을 대표해 내년 3월 열리는 미국 아카데미시상식 국제장편영화 부문에 출품됐다. 앞서 독일의 오스카로 불리는 독일영화상에서는 최고작품상, 시나리오상, 편집상, 감독상, 여자주연상 등 5관왕에 오른 작품인 만큼 아카데미 최종 후보에 오를 것이라는 예측이 나온다.
미카엘 하네케 감독의 ‘하얀 리본'(2010) 등으로 존재감을 알린 베네슈는 이번 작품에서 가장 뛰어난 연기를 보여준다. 여기저기서 몰아치는 비난을 가까스로 견디는 카를라의 얼굴에 집중하다 보면 객석에까지 갑갑함이 전해진다.
오는 27일 개봉. 99분. 12세 이상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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