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하행사 취소·축소…’건물 잔해 속 아기예수’ 구유장식도 등장
“순례·여행객 거의 없어…코로나19 때보다 더 안좋은 상황”
레바논 남부도 폭격 속에 성탄 분위기 실종
(서울=연합뉴스) 권수현 기자 = 기독교 대축일이자 세계인들의 축제인 성탄절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지만 예수 탄생지로 알려진 요르단강 서안의 도시 베들레헴의 분위기는 한없이 가라앉아 있다.
미국 일간지 워싱턴포스트(WP)와 뉴욕타임스(NYT) 등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의 전쟁이 두 달 넘게 이어지면서 베들레헴은 슬픔과 애도의 도시가 됐다고 23일(현지시간) 전했다.
해마다 성탄절이면 베들레헴에서는 화려한 트리 점등식과 드럼·백파이프 연주자의 퍼레이드 등 떠들썩한 축하 행사가 진행됐다.
명소인 구유 광장(Manger Square)이나 시장 등 거리 곳곳은 전 세계에서 몰려든 순례객과 여행자로 북적이고, 캐럴 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아이들은 산타에게서 사탕을 받고 웃음지었다.
하지만 올해는 어둡고 침울한 공기만이 도시를 감싸고 있다. 트리나 불빛 장식, 퍼레이드, 캐럴 등 어느 것도 찾아볼 수 없다.
베들레헴에서 불과 70㎞ 떨어진 곳에 있는 가자지구에서만 2만명이 넘게 숨진 상황에서 아무도 성탄절을 기쁘게 맞을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축하 행사는 취소되거나 대폭 축소됐다. 베들레헴 시는 가자 주민들과 연대하는 의미에서 올해 공개 기념행사를 취소하기로 결정했다.
예루살렘의 여러 교회 총대주교와 수장들도 지난달 성명을 내고 신도들에게 “불필요한 축제 활동”은 자제해 달라고 당부했다. 이들은 축하 행사 대신 “목회 활동과 성찬 의식에서 성탄절의 영적 의미에 더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성모 마리아와 성 요셉의 여정을 기려 예루살렘부터 베들레헴까지 이어지는 가톨릭 총대주교의 행렬도 규모가 크게 줄었다.
보통은 30명에 가까운 보이스카우트들이 백파이프를 연주하며 총대주교와 함께 시내를 돌지만 올해는 소수의 대원이 악기를 연주하는 대신 평화를 비는 성경 구절과 가자지구 어린이들의 사진을 들고 묵묵히 행진하기로 했다.
예수 구유 장식에도 전쟁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베들레헴의 한 복음주의 루터교 교회는 아기 예수가 팔레스타인을 상징하는 검은색과 흰색의 체크무늬 두건 ‘카피예’에 싸여 가자지구를 상징하는 부서진 벽돌과 시멘트 조각 사이에 누워있는 모습으로 구유 장식을 꾸몄다.
이 교회의 문테르 이삭 목사는 “오늘 ‘기쁘다 구주 오셨네’라고 노래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며 “오늘 예수가 온다면 그는 가자지구의 돌무더기에서 태어날 것이다. 이것이 팔레스타인의 성탄절 모습이고 진정한 메시지”라고 말했다.
이삭 목사는 유대 왕 헤롯의 박해를 피해 만삭의 성모 마리아가 남편 성 요셉과 함께 예루살렘을 떠나 이집트로 가다가 베들레헴의 한 마구간에서 예수를 낳는 복음서의 이야기가 오늘날 팔레스타인의 상황을 상기시킨다고 지적했다.
그는 “예수 역시 고난 속에 태어났고 학살에서 살아남아 난민이 됐다”며 “이는 팔레스타인 사람이라면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라고 말했다.
베들레헴이 있는 요르단강 서안지구에서도 이번 전쟁의 여파로 긴장이 높아지면서 올해 성탄절에는 외부 방문객을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됐다.
6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예수 탄생 기념성당에는 몇몇 기자와 소수의 순례자 외에 거의 인적이 끊겼다. 이전 같으면 예수가 태어난 곳으로 알려진 동굴을 보러 온 사람들이 몇시간씩 줄을 서서 기다리곤 했던 곳이다.
이 교회의 관리인 니콜라 하두르는 “코로나19 팬데믹 때보다 더 상황이 안 좋다”고 말했다.
게스트하우스 매니저로 일하는 로니 파쿠리도 “보통 10월 초부터 이듬해 1월 사이에 오는 손님이 최소 200명은 됐는데 올해는 10월 7일부터 지금까지 12명만 왔다”며 “다른 호텔에서 야간 업무를 맡고 있는데 코로나19 시절에도 유지했던 그 일자리를 이번에 잃었다”고 말했다.
베들레헴은 성탄절을 낀 연말 휴가철 관광 수입에 크게 의지하고 있는데 이번 전쟁으로 큰 타격을 받았다. 한나 하나니아 베들레헴 시장은 “경제가 마비됐다”고 말했다.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으로 거의 매일 폭격 소리를 듣게 된 레바논 남부도 비슷한 상황이라고 AFP통신이 전했다.
레바논 남부 국경에 있는 기독교도들의 마을 클라야는 성탄절 즈음이면 외국에 사는 가족과 친인척들이 돌아와 활기를 띠었지만, 올해는 마을 인구의 60%만 남아있다. 해가 진 뒤에는 거리를 오가는 사람조차 보기 힘들다.
남편과 둘이 이 마을에 사는 와나(67)는 “크리스마스 기분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다”며 “자녀들은 베이루트와 외국에 나가 살고 있지만 우리는 집에 남겠다. 여기서 죽더라도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가자지구에 가족을 둔 기독교인들은 성탄절을 앞두고 더 심란해진 마음을 다잡고 있다.
미국 워싱턴DC에 사는 칼릴 사예는 며칠 전 가자지구에 있는 부친의 사망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의 부모와 자매, 형제 등 가족들은 가자지구 교회로 피신한 상태다.
사예는 “그들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음식이나 물은 있는지, 굶주리는 것은 아닌지, 아무것도 알 수 없어 두려움 속에 살고 있다”고 호소했다.
베들레헴의 프란치스코회 수도사 라미 아사크리에는 이런 상황일수록 성탄절의 정신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아사크리에는 “사람들은 우리가 성탄절을 취소한다고 말하지만 우리는 기념행사만 취소한 것이지 미사는 드린다”며 “우리는 어느 때보다 크리스마스 메시지가 필요하다. 평화와 사랑, 빛이 필요하다”고 힘주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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