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웃음으로 조선을 그리다, 영미편’…해학·풍자의 일화 121편 담겨
(서울=연합뉴스) 이동경 기자 = “곁눈질하면서 남의 것을 베낀다고 정신이 없거나 함께 모여 답안을 쓰는가 하면, 대필을 서슴없이 해주고 답안지도 과감하게 바꿔치기하고….”
1980년대 상아탑 청춘들을 주제로 한 영화 속의 한 장면에에서나 나올만한 이러한 모습이 조선시대 과거시험장에서 흔했을까.
조선 후기 문신인 이운영(1722~1794)이 쓴 야담·필기집인 ‘영미편'(濴尾編)을 완역한 책 ‘웃음으로 조선을 그리다, 영미편’의 일화 속에 등장하는 내용에 관심이 쏠린다.
이운영은 자신이 현감을 지냈던 충청도 황간에서 환갑을 앞두고 짧은 유배 생활을 하던 중 해학과 풍자가 담긴 121편의 일화들로 영미편을 완성했다.
‘과거시험장, 최고의 놀이판’, ‘술주정이 되어버린 벼슬 청탁’, ‘쓸모없는 사위 놈’, ‘개가 오줌 눌 때 발을 드는 이유’, ‘돌아가신 아버지께 맞은 사연’ 등 각 편의 제목만으로도 호기심을 자아낸다.
일화 중에는 술자리에서 벌어지는 포복절도할 에피소드를 비롯해 과거시험에서 참시관들의 눈을 피해 낯 뜨거운 부정행위를 벌이는 세태에 대한 풍자도 등장한다.
법당에 모신 금부처가 감실(龕室) 밖으로 나온 뒤, 사대부 집안의 난봉꾼들이 기생을 끼고 노는 술자리에 가고 싶으냐는 노승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는 내용은 불자들을 실소하게 만든다.
개는 원래 발이 세 개였는데, 마구 뛰어다닐 수 있게끔 발 한 개를 더 달라고 옥황상제에게 간절히 희망해 하사받은 귀한 발이기 때문에 오줌이 튀지 않게끔 발을 들고 볼일을 본단다.
영미편은 천성적으로 해학을 즐기고 남을 웃기기를 좋아했던 이운영이 직접 보고 듣거나 창작하면서 평소 갈무리한 재미난 이야기를 유배지 체류 기간 써 내려간 것들이다.
당시 생활 전반의 관습이나 제도, 양태 등을 생동감 있게 묘사한 데다가 숨겨진 이야기들도 담겨있어 한문 서사의 전통을 풍부하게 해준다고 옮긴이는 말한다.
이운영은 고려말 대학자 목은 이색(1328∼1396)의 14대손으로, 한양 인근에 거주하는 경화사족(京華士族), 즉 왕실의 종친과 권력을 공유하는 명문가 출신이었다.
학계에서는 가사(歌辭) 작가로 알려져 왔지만, 영미편은 야담 창작가로서의 그의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운영은 실제 유람과 풍류를 즐겼고, 평생 바둑도 즐겨 잘 알려지지 않은 국수(國手)들의 이야기와 바둑에 대한 애호를 야담집에 담기도 했다.
영미편에 가득한 해학과 폭소는 낙천적인 그가 유배 기간을 마치 휴가처럼 보내고 싶어 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영미편은 다른 판본이 없는 유일본으로, 현재 일본 교토대학 가와이문고에 소장돼있다고 한다.
‘영미’는 중국 요(堯) 임금 때 은사(隱士)인 허유(許由)가 은거하던 곳인데, 이운영이 자신의 처지를 은사에 빗대어 책 이름에 붙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진경 옮김. 5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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