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박물관서 원주민 유물·유해 사라져…새 시행령에 퇴거 ‘급급’

“원주민 문화유산·유해 전시하려면 사전에 부족 동의 받아야”

미국 시카고 필드뮤지엄 전시관
[시카고 필드뮤지엄 웹사이트 캡처. 재판매 및 DB 금지]

(시카고=연합뉴스) 김현 통신원 = 미국 의회가 1990년 입법을 완료하고도 논란이 많아 시행이 더뎠던 ‘원주민 봉분 보호 및 유해 송환법'(NAGPRA) 시행령 개정안이 12일(현지시간) 발효했다.

이에 따라 원주민 유물과 유해를 소장하고 있는 미 전역의 박물관들이 자구책 마련에 분주한 모습이다.

시카고 트리뷴과 미술전문지 ‘아트뉴스’ 등에 따르면 미국의 대표적 자연사 박물관 중 하나인 ‘시카고 필드 뮤지엄’은 12일부터 ‘고대 아메리카 전시실’의 미국 원주민 관련 유물 진열장에 가림막을 친 채 관람객들을 맞고 있다.

박물관이 원주민의 문화 유산이나 유해·유골을 전시하려면 반드시 해당 부족의 사전 동의를 받고, 부족 측이 원할 경우 연구조사를 허용해야 한다는 내용의 연방법 시행령이 이날 발효된 데 따른 임시 조치다.

미국 내무부는 지난달 “9만6천여 구의 미국 원주민 유해가 크고 작은 박물관에 보관돼 있다”며 “원주민 유산과 유해 송환에 속도를 붙이기 위해 1990년 제정된 NAGPRA 관련 시행령을 전면 개정하고 규제를 강화하겠다”고 발표한 바 있다.

만일 박물관이 규제에 따르지 않다가 적발되면 정부는 거액의 벌금을 부과할 수 있다.

트리뷴은 “미 전역의 박물관들은 새 시행령 발효를 앞두고 전문 법조인과 대책을 논의하는 한편, 향후 수년간 직원 채용·예산 집행 등에 영향을 미칠 관련 규정 파악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새 시행령이 발효됨에 따라 각 박물관은 원주민 관련 전시물들을 그대로 두고 위법 가능성을 감내할 것인지, 우선 전시물들을 치우고 시간이 얼마나 걸릴 지 모르는 원주민 부족의 동의서를 받기 위한 절차 밟기에 나설 지 결정해야 했다고 부연했다.

필드뮤지엄은 금주 자체 웹사이트를 통해 “해당 부족들과 논의를 진행하는 동안 새 시행령의 영향을 받을 것으로 판단된 문화재 진열장을 모두 덮어놓겠다”며 “유해·유골은 전시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뉴욕의 ‘미국 자연사 박물관’과 하버드대학의 피바디 고고학·민족학 박물관 등은 아직 대책을 내놓지 않았다.

아트뉴스는 “미국 원주민 부족 대표들과 송환 옹호론자들은 ‘박물관과 대학 연구기관들이 부족들과의 소통을 꺼리면서 송환 절차를 지연시켜 왔다’고 주장한다”며 이들 사이의 긴장이 수십년째 계속되고 있다고 전했다.

이어 “연방 정부가 수십개의 원주민 부족 대표들과 협의해 만든 새 시행규칙에는 박물관이 원주민 유물·유해를 연구·전시하는 대가를 원주민 부족에게 지불하도록 하는 내용도 포함돼있다”고 부연했다.

원주민 부족과 원주민들을 지원하는 비영리단체 ‘미국 인디언 문제 협의회'(AAIA) 측은 “법을 적극적으로 지키도록 해야 한다”며 규제 강화를 지지했다.

하지만 박물관 측과 고고학계 일부 지도자들은 새 시행령에 대해 “규제가 지나치다. 각 박물관이 자율적으로 소장품을 관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반발했다.

시카고 필드뮤지엄은 1894년, 시카고 만국박람회(1893) 전시 물품들을 보관하기 위해 처음 설립돼 2007년 고대 아메리카 전시실을 설치했다. 연간 방문객 수는 200만 명에 달한다.

작년 가을 공개된 연방정부 데이터에 따르면 필드뮤지엄은 원주민 유해를 가장 많이 갖고 있는 미국 박물관 중 하나로 현재 1천200구를 소장하고 있다.

chicagorho@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