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일 부천아트센터 바르샤바필 내한 공연…독특한 결합으로 신선한 연주
(서울=연합뉴스) 나성인 객원기자 = 음악 작품은 고정돼 있지 않다. 작곡가가 어떤 악상을 악보로 ‘고정’해 놓았다 하더라도 그 재현 과정에서 수많은 새로움이 생겨난다. 어쩌면 그러한 새로움을 만끽하는 것이 음악 공연의 본질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지난 13일 부천아트센터에서 열린 바르샤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내한 공연이 그러했다. 지휘자 안제이 보레이코가 이끄는 바르샤바필이 이날 선보인 ‘독일 작품’들은 베를린 슈타츠카펠레나 빈 필하모닉처럼 ‘정통’은 아니라도 그들만의 색채와 멋을 들려줬다.
1부 첫 곡은 폴란드가 낳은 위대한 작곡가 비톨트 루토스와프스키의 ‘작은 조곡’이었다. 폴란드 민요에 기반을 둔 이 네 개의 소품은 다채로운 음향과 인상으로 관객들의 귀를 깨우기에 충분했다. 1곡 ‘피리’에서는 솔로 악기 피콜로와 금관이 일으키는 긴장감을 따뜻한 현악의 화성으로 지워내는 수법이 인상적이다. 급박한 2박 리듬이 유희적으로 펼쳐지는 2곡 ‘후라 폴카’에서는 익살스러운 목관의 움직임과 금관의 긴 모티프가 관현악 총주로 확장됐다.
3곡 ‘노래’는 클라리넷과 플루트, 오보에 등 목관 파트의 실내악적 앙상블로 시작해 현악의 따뜻한 화성과 부드러운 선율이 강조되는데 마치 첫 두 곡의 메아리처럼 약음기 낀 금관이 반복 리듬을 익살스레 연주됐다. 마지막 곡 ‘춤’에서는 앞 곡에서 등장한 긴장 혹은 대조의 요소 및 전통적, 선율적 요소를 하나로 종합해 하나의 대단원으로 나아갔다. 이 작은 모음곡은 바르샤바필의 상큼한 환영 인사와도 같았다. 악단은 선명하고도 확고한 음향으로 불협화에서 협화로, 리듬에서 화성으로, 앙상블에서 총주로의 변화를 훌륭하게 전달했다.
이윽고 피아니스트 라파우 블레하츠와 함께 한 슈만의 피아노 협주곡이 이어졌다. 슈만의 피아노 협주곡은 낭만주의 피아노 협주곡의 최고 명작 반열에 있지만, 인상적인 연주를 실연에서 만나기가 쉽지 않은 난곡이다. 피아노 솔로가 노래하는 사색적인 대목이 적지 않지만, 짧은 시간 갑자기 격정을 표출해야 하는 부분이 계속 등장하고, 관현악과 피아노가 함께 전체 악상을 구축하도록 긴밀하게 짜여 있어 상당한 절제력과 균형 감각, 깊이와 폭발력 등을 동시에 요구하기 때문이다.
블레하츠는 매우 신선하고도 인상적인 연주를 들려줬다. 1악장은 ‘어쩌면 악단과 피아니스트가 서로 다른 템포로 호흡하고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특이했다. 블레하츠는 일관성 있게 다소 빠른 템포로 악상을 시작했던 것에 반해 보레이코가 이끄는 악단이 끼어들어 솔로와 함께 협주가 시작될 때는 예외 없이 호흡이 좀 더 느긋하게 조정되는 듯했다. 보다 즉흥적이고 휘발적인 솔로 파트의 템포와 보다 일정하고 엄격한 협주의 템포가 공존하며 일종의 길항작용을 하는 듯했다. 쇼팽과 독일 교향악의 만남이라든지 말러가 쓴 협주곡이 아닐까 싶은 독특한 결합이었다.
물론 이 때문에 두 템포가 서로 부딪히는 부분에서 화성적 디테일, 악구의 형태가 다소 뭉개지는 부분도 있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밀고 당기면서도 하나의 일체로서의 결합력을 잃지 않는, 매우 색다른 역동성을 들려줬다. 악단이 길고 서정적인 노래 주제를 연주하는 2악장에서는 템포 상의 차이보다는 짧게 끊어가는 피아노의 리듬과 대 긴 오케스트라의 선율 라인이 대조를 이뤘는데, 블레하츠 특유의 서정적인 터치는 관현악의 노래에 반짝임을 덧입히는 것처럼 인상적이었다. 특히 2악장 끝에 주제를 장조 및 단조로 회상하는 장면이 아름다웠다. 1악장이 템포 상의 대립, 2악장이 오케스트라의 느긋한 템포에 맞춰졌다면, 3악장은 피아노의 다소 빠른 템포 및 순간적 변화가 전면에 부각되는 듯했다.
악상이 정밀하고 교묘하게 조합돼 있는 슈만의 협주곡이지만, 바르샤바필은 차분하게 구조를 드러내기보다는 축제로 나아가는 흥겨움과 즉흥성을 강조한 듯했다. 안정적이기보다는 위험을 많이 무릅쓴 연주요, 짜릿한 재미가 있는 시간이었다. 우연이나 호흡의 불일치로 보기에는 전체 과정에 일관성이 나타나, 특이하고 색다른 해석으로 들리는 흥미로운 연주였다. 블레하츠의 아름답고 유려한 연주는 명불허전이었지만, 보레이코가 들려준 유연한 리드 또한 훌륭했다. 불안정성을 머금고 위태로운 균형을 지켜가며 격렬함과 서정성을 동시에 드러내는 슈만 음악의 본질이 드러난 희귀한 순간이었다.
다만 2부의 브람스 교향곡 2번은 1부만큼 인상적이지는 못했다. 물론 바르샤바필은 음향적 차원에서 충분한 개성을 느끼게 해 줬다. 솔로 악기들의 선명함과 선율의 굴곡은 독일의 단단함과는 다른 감성이었다. 화려하고 색채적이되 경건함을 머금은 폴란드적인 사운드였다. 그러나 2악장에서 목관과 현악 사이의 불일치, 4악장 초입에서의 집중력 부족 등 완성도가 1부에 비해서는 떨어졌고, 해석의 차원에서도 신선한 면은 많지 않았다.
음악은 사라지기에 소중하다. 1부의 루토스와프스키와 슈만만으로도 이번 공연은 흡족했고, 오래 가는 여운을 남겼다. 단 한 순간이라도 오래가는 감동을 안겨줬다면 우리가 블레하츠와 보레이코, 바르샤바필에 보낸 찬사는 전혀 아깝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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