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년 동안 YS의 ‘대도무문’ 뒷바라지…DJ의 ‘정치적 동지’ 이희호와 대조
“한번도 자신을 내세운 적 없어…한결같은 사랑과 내조에 김영삼의 오늘이 있었다”
(서울=연합뉴스) 안채원 기자 = 95세로 삶을 마친 손명순 여사는 ‘3김(金) 시대’를 열었던 세 거물, 김영삼·김대중·김종필 부부 중 마지막 생존자였다.
손 여사는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당시 서울대 3학년이던 김영삼(YS) 전 대통령과 결혼했다. 이후 남편이 ’40대 기수’로 성장하며 군사정권의 탄압을 받았을 때도, 민주화 투쟁과 3당 합당을 거쳐 첫 ‘문민 대통령’으로 정점에 올랐을 때도, 그리고 ‘IMF 책임론’ 속에 인생의 내리막을 걸었을 때도 그의 곁을 가장 가까이서 지켰다.
정치부 기자 시절 YS의 ‘상도동계’를 담당했던 이낙연 새로운미래 대표는 8일 손 여사 빈소에서 취재진과 만나 이렇게 회고했다.
“손 여사님은 김영삼 대통령님의 영광과 수난을 함께하신 위대한 삶을 사셨습니다. 이로써 3김 시대 내외분이 모두 우리 곁을 떠나셨습니다. 3김 시대가 완전하게 끝난 겁니다. 한 시대가 바뀌는 현장에 우리가 있습니다.”
이 대표의 말처럼 3김 정치인과 그들의 부인은 손 여사의 별세로 이제 모두 고인(故人)이 됐다.
이들의 생전 행적이나 스타일은 사뭇 다르다.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 여사는 2019년 97세로 유명을 달리했다. 이 여사는 ‘DJ의 정치적 동지’로 왕성한 대외 활동을 했다. ‘DJ의 영원한 비서실장’인 박지원 당시 민주평화당 의원은 “(이 여사는) 김대중 대통령님의 영원한 인생 반려자이자 정치적 동지”라며 “‘김대중은 이희호로부터 태어났다’라고 할 정도로 김 대통령님에 대한 여러 가지 영향력을 끼치신 분”이라고 했다.
김종필(JP) 전 국무총리의 부인 박영옥 여사는 2015년 86세로 별세했다. 박 여사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셋째 형인 박상희 씨의 장녀로 태어났으며, 박정희 전 대통령의 소개로 JP와 만났다.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는 사촌언니인 셈인데, 교류는 그다지 활발하지 않았다고 한다. 박 여사는 대외 활동보다는 JP를 내조하는 스타일이었다.
이들과 함께 3김 시대를 지켜봐 온 손 여사도 전통적 방식의 ‘내조 정치’로 정평이 나 있다.
손 여사는 YS 상도동 저택의 안주인이었다. 숱한 정객(政客)과 기자들이 드나들던 저택의 사랑방에는 손 여사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었다.
“기자 시절 아침에 상도동에 가면 사랑방에서 기자나 비서진 등 많은 사람이 아침밥을 먹곤 했습니다. 그때 거의 매일 아침 나왔던 것이 멸치를 듬뿍 넣은 시래깃국, 거기에 밥을 말아 먹거나 따로 먹거나 그랬습니다. 여사님께서는 간간이 그 사랑방에 오셔서 반찬에 부실함은 없는지, 또 저희 같은 사람들이 맛있게 먹는지 살펴보시고는 했습니다. 참 따뜻한 분이셨습니다. 여사님의 따뜻함을 아직도 저는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이낙연 대표)
YS도 자신의 정치적 업적에서 손 여사를 빼놓을 수 없다고 고백했다.
2011년 3월4일, 시내 한 호텔에서 열린 두 부부의 회혼식(回婚式·결혼 60주년을 맞아 여는 행사)에서 YS는 이렇게 고백했다.
“저의 아내 손명순은 언제나 자신을 낮추고 남편인 저를 높여주었습니다. 젊어서는 고생도 너무 많이 했습니다. 화를 잘 내는 저에게 언제나 져줬습니다. 아내는 한 번도 자신을 내세운 적이 없습니다. 아내는 자신을 죽이고, 가정의 평화를 지켜왔습니다. 이 김영삼의 오늘이 있음은 제 아내 손명순의 한결같은 사랑과 내조 덕택이었다는 것을 여기서 고백합니다.”
경상도 사투리가 심한 YS는 손 여사를 ‘맹순씨’, ‘맹순이’로 부르며 농을 던지곤 했지만, 남편이 정치적 고비에 놓였을 때 결정적 역할을 한 사람 역시 손 여사였다.
YS가 1983년 5월 신군부에 항의해 가택연금 상태서 벌인 단식 투쟁을 벌일 때는 외신 기자들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손 여사는 YS의 대통령 당선 후 가진 인터뷰에서 “(단식 당시) 남편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절박감에 만류하기도 했다. 저는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만 했다”고 털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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