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제의의 음악으로 축제를 만든 율리우스 베르거와 여자경

13일 교향악축제 대전시향 연주…붉게 어두워지는 조명도 깊은 인상

지휘자 여자경과 첼리스트 율리우스 베르거
[예술의전당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연합뉴스) 나성인 객원기자 = 클래식 레퍼토리 가운데서도 동양적인 선율과 환상적 요소, 깊은 종교적 여운을 결합한 대표적인 대작 두 곡이 2024년 교향악 축제에서 연주됐다.

지난 13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지휘자 여자경이 이끄는 대전시향과 첼리스트 율리우스 베르거의 협연에서다. 이날 공연 프로그램인 1부 에른스트 블로흐의 첼로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히브리 환상곡 ‘셸로모’는 유대 음악을, 2부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은 원시 부족의 봄의 희생 제의를 그린다.

특히 ‘셸로모’는 실연으로 접하기 어려운 명곡이다. 첼로 독주부의 초절기교, 관현악 파트의 정교한 앙상블을 요구한다. 이런 기교적 측면보다 더 중요한 지점은 곡이 다루고자 하는 깊은 세계관이다. 이스라엘 왕이자 전도서의 저자인 솔로몬의 모토 ‘모든 것이 헛되니 다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도다'(전도서 1장 4절)는 모티브를 첼로의 독주에 담아내야 한다.

게다가 이 작품은 유대 음악의 미묘한 감성을 후기 낭만주의적 관현악에 녹이고 있어 기교만을 가지고 접근할 수 없다. 첼리스트는 마치 모놀로그를 연기하는 배우처럼 깊은 독백의 어조로 솔로몬의 심경 토로를 표현해야 하고, 동방적인 음악 심상에 설득력 있게 접근해야 한다.

첼로 협연자 베르거는 아마도 이 작품에 관한 최고의 해석자 중 한 사람일 것이다. 그는 이날 연주에서 사색적이고 체념적인 어조의, 그야말로 노년에 어울리는 독주를 들려줬다. 특히 탁월했던 것은 깊고 안정적이되 다양한 색깔로 선율을 조형해 나가는 음악적 호흡이었다. 기본적으로 어둡고, 침잠하는 고백조의 선율에서도 순간순간 격정과 고통의 토로, 삶의 기쁨과 즐거움, 비관 등, 전도서의 여러 어조가 그려지는 듯했다. 베르거는 매 순간의 운궁(보잉)을 하나도 허투루 보내지 않았으며 그 결과 전체가 하나의 뜻 있는 낭송처럼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대전시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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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에 기교, 화려함, 참신함, 재치 외에 영성을 드러낼 수 있는 연주자가 몇이나 될까. 첼로의 근원을 탐구하는 구도자로 시대와 호흡하며 현대 작품을 발굴해 왔던 베르거의 깊이가 남다르게 와 닿았다. 바흐의 무반주 첼로 조곡 1번 전주곡, 코랄 ‘진심으로 주를 바라오니’, 이탈리아 민요 ‘산 정상의 제왕’, 카살스의 ‘새의 노래’ 등 네 곡이나 선사한 앙코르에서도 그러한 구도자적인 자세를 느낄 수 있었다.

베르거의 독주를 보좌했던 대전시향 또한 훌륭한 연주를 들려줬다. 작품의 가운데 부분에서는 성경의 ‘양각 나팔 소리’를 모방하는 관악 모티브는 표현력을 지니면서도 잘 통제돼 있어 대단히 뛰어난 효과를 들려주었다. 또 독주부와 현악이 함께 움직일 때도 입체감을 느낄 수 있었다. 전체적으로 잘 준비된 연주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2부에서 대전시향은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은 강렬하고 확고한 리듬, 각 파트가 단단하게 일체를 이룬 다부진 연주를 들려줬다. 전체 템포는 빠른 편으로 군더더기 없이 악상의 인상을 드러냈는데, 이 점은 작품 전체적인 ‘날 것의 느낌’을 표현하는데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첫머리 바순 솔로, 그리고 곧 이와 함께 어우러지는 목관의 앙상블 또한 나른한 봄의 풍경을 훌륭하게 포착했다.

지휘자 여자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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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경은 특히 앙상블 전체의 리듬적 일치, 음향적 효율성과 균형에 많은 공을 들인 듯했다. 상당히 까다로운 복합 리듬, 그리고 복합 조성의 긴장감이 빠른 템포에서도 효과적으로 유지되어 듣는 내내 몰입할 수 있었다.

다만 제전이 점점 진행됨에 따라 나타나는 공격성의 성격은 다소 단조로웠다. 예를 들어 1부 마지막 부분의 ‘대지의 노래’의 경우 큰북과 탐탐의 트레몰로로 시작되는데, 여린 데서 시작해 갑자기 엄습하는 느낌보다는 직선적인 타격의 느낌과 크게 차이가 없었다. 비슷하게 전체적으로 원시성과 공격성은 잘 표현됐지만 취한 듯한 몽롱함, 일종의 환각적인 도취의 묘는 제한적으로만 드러난 것이 아쉬웠다.

이날 공연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희생 제물로 ‘선택된 처녀’가 절정의 황홀경에서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점점 붉게, 어두워지는 조명 효과로 강조했다. 단순한 효과이지만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적 진행과 잘 맞아떨어져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매년 진행되는 교향악 축제는 ‘교향악’을 접할 기회일 뿐 아니라 점점 ‘축제’다운 모습도 보이고 있다. 참여 악단들의 헌신적인 연주와 관객에게 더 다가가고자 하는 노력, 동시에 잘 만나기 어려웠던 명작들을 소개하려는 음악가적인 책임 의식 등이 어우러져 우리 문화계에 긍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이날 공연은 그러한 축제의 분위기를 잘 느끼게 해준 소중한 기회였다.

대전시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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