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로 보는 세상] 해학일까? 한탄일까?

(서울=연합뉴스) 도광환 기자 = 조선 회화는 산수화가 주류지만, 그림이 품은 주제는 여러 가지다.

안견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엔 안평대군의 꿈이 서려 있고, 정선 ‘금강전도(金剛全圖)’엔 자연에 대한 경외가 있으며, 작자 미상인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엔 격조 있는 이상 세계가 엿보인다.

‘소상팔경도’ 중 ‘원포귀범(遠蒲歸帆)’
국립진주박물관 소장

신윤복 풍속화에는 은근한 에로티시즘이 노골화됐으며, 조희룡 ‘홍백매화도(紅白梅花圖)’는 매화에 대한 향기로운 예찬이다. 기인 화가였던 최북의 명작, ‘풍설야귀인도(風雪夜歸人圖)’는 밤의 정적 혹은 우수와 접속해 있다.

‘홍백매화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풍설야귀인도’
개인 소장

우리 그림에서 얻는 감수성은 다양하게 수용되지만, 문인화가나 화원들 그림이라는 한계 탓에 ‘해학(유머)’을 감지할 수 있는 그림은 드문 편이다.

조선 중기 문인화가 김시(金視. 1524~1593)가 그린 대표작을 통해 부담 없는 웃음을 머금을 수 있다. 산수 인물화로 분류되는 ‘동자견려도(童子牽驢圖)'(1548)다. ‘동자가 나귀를 끌다’라는 뜻이다.

‘동자견려도’
리움미술관 소장

세로로 긴 넓은 화면은 다소 심심해 보인다. 아래로 눈길을 옮기니 크지 않게 그린 한 동자와 나귀를 만나는데, 둘의 진지한 표정을 살피는 순간 웃지 않을 수 없다.

개울을 건너지 않으려는 나귀가 고집을 부리며 버티고 있다. 자신의 임무에 충실한 동자는 제 갈 길을 위해 힘껏 고삐를 당기고 있다. 한적한 산속에서 벌어진 힘과 힘의 대결이다.

힘겨루기 끝에 동자는 고삐를 놓치고 나귀는 돌아서 달아날까? 동자의 힘에 굴복한 나귀는 온순해져서 개울을 건널까? 결말은 감상자 상상의 영역이다.

앞뒤 자연에 대한 묘사도 놓칠 수 없다. 비스듬하게 솟은 주산(主山)의 각진 모습과 바위와 봉우리, 나무 표면에 그린 흑백 대비는 그의 독특한 화풍으로서 동자와 나귀의 대결을 북돋우는 조연 역할을 한다.

그의 다른 그림으로 알려진, ‘기우취적도(騎牛吹笛圖)’는 소 등에 올라 피리를 부는 동자 모습이다. 동자가 올라탄 소는 우리 소 같지 않다. 중국 물소를 해학적으로 그린 듯하다. 한가로운 전원 풍경이다.

‘기우취적도’
개인 소장

비록 중국 물소를 차용했지만, 우리 정서에 친근한 소는 이후 이경윤, 심사정, 김홍도 및 현대화가 이중섭, 김기창에 이르기까지 쉼 없이 이어진다. 김시는 ‘황우도(黃牛圖)’, ‘목우도(牧牛圖)’, ‘우배도하도(牛背渡河圖)’ 등 소를 소재로 한 여러 작품을 남겼다.

김기창 ‘청산목가’ (1984)
개인 소장

김시는 당대 최고 권력자였던 김안로(金安老. 1481~1537)의 막내아들이었다. 하지만 혼인하던 해인 1537년 김안로는 역적으로 몰려 사사(賜死)된다. 그의 앞길은 막혔다. 과거는 포기하고 서화에만 전념했다.

이런 이유로 그림 주제는 한가한 전원에 대한 애수에 한정되지만, 그의 그림은 최립의 문장, 한석봉의 글씨와 함께 당대 ‘삼절(三絶)’로 불릴 만큼 조선 초기와 중기 회화를 잇는 걸출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그의 생애를 반추하며 ‘동자견려도’와 ‘기우취적도’를 다시 감상한다. 해학과 여유만 담은 게 아니다.

가문의 몰락으로 관직에 나설 수 없던 작가의 처지를 상기하면, 애타게 나귀를 당기는 동자와 소 등에 올라 피리를 부는 동자는 그의 신세 한탄으로 추측할 수 있다.

자연은 그의 취향이 아니라 덜미였을 것이다. 날카로운 산세와 꾸불꾸불 뻗은 나무는 그의 고뇌를 상징하는 완강한 구속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그는 비루하지 않았다. 작품으로 일어섰다.

dohh@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