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연구자들이 바라본 문화대혁명…신간 ‘문화대혁명’·’당과 인민’
(서울=연합뉴스) 송광호 기자 = “조반유리(造反有理), 조반유리.”
학생들로 이뤄진 홍위병(紅衛兵)은 칭화대 물리학과 교수 예저타이가 단상에 끌려 나오자 ‘반항하는 것은 옳은 일, 혁명은 죄가 없다’는 문화대혁명의 구호를 외쳤다. 원자 폭탄을 만드는 데 초석을 놓으며 미 제국주의를 강화하는 데 한몫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가르치는 건 혁명에 반하는 일이었다. 자아비판을 거부한 예저타이는 학생들에게 맞아서 죽었다.
‘반동분자’ 예저타이 딸이자 뛰어난 학생이었던 예원제는 농촌으로 끌려가 집단 노동을 해야 했다. 그곳에선 농촌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벌목 등 환경 파괴가 자행되고 있었다. 환경 파괴를 멈춰야 한다는 레이첼 카슨의 사상에 경도돼 있던 예원제는 혁명의 파괴적인 모습에 또 한차례 절망한다.
여러 곡절을 겪은 후 재능을 인정받아 비밀 연구소에서 일하게 된 예원제는 절망적인 사건을 잇달아 겪으며 인류를 불신하게 되고, 외계인과의 교신을 시도하던 중 무서운 결심을 하게 된다.
넷플릭스 인기작 ‘삼체’의 개괄적인 줄거리다. ‘삼체’를 이끌어가는 이야기의 동력은 중국 문화대혁명이다. 1966년부터 1976년까지 10년간 마오쩌둥과 홍위병을 중심으로 일어난 사회주의 운동을 말한다. 예원제를 극단적인 선택으로 밀고 간 문화대혁명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리처드 커트 크라우스 미국 오리건대 정치학과 명예교수가 쓴 신간 ‘문화대혁명’에 따르면 문화대혁명은 “공산주의 혁명을 재점화”하려는 최고 지도자 마오쩌둥 주석의 운동이자 권력 투쟁의 산물이다.
당시 마오쩌둥은 당 주석 자리를 지키고 있었지만, 행정은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이 주도하고 있었다. 이들은 익숙한 레닌주의 틀 안에서 당 통제의 완화, 온건한 시장 개혁 및 보다 느슨한 문화 지배를 지지하고 있었다. 마오쩌둥은 이런 “자유화”가 마뜩잖았다. 마오쩌둥이 보기에 공산 세력에 패배한 봉건주의와 부르주아 세력의 이데올로기는 교육, 예술, 대중문화 속에 여전히 내재해 있었으며 이들 구세력은 문화 등을 통해 혁명 세력을 점차 몰아세우고 있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마오쩌둥은 당 밖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는 사람들을 사주해 당 지도자의 아랫사람들을 공격하게 하면서 그들을 점차 고립시켰다. 무엇보다 그는 학생들을 주목했다. 중국 같은 권위주의 사회에서 10대들은 발언 기회가 거의 없었는데, 최고지도자가 정적들을 공격하자 그들은 들불처럼 일어났다. 홍위병이라 불린 그들은 “거의 모든 기존의 권력에 열광적으로” 맞섰다. 반동분자의 집을 급습하고, 그들을 수용할 감옥까지 만들었다.
“10대들은 젊고 짊어져야 할 사회적 책임이 별로 없기 때문에 행동주의에 경도되었고, 내부 분열과 무모한 행동을 조장했다.”
덩샤오핑을 비롯한 보수적 지도자들은 숙청됐고, 마오주의자들은 승승장구했다. 쓸모가 다해진 홍위병들은 1968년 5월부터 농촌으로 파견됐다. 문화대혁명의 폭력적인 부분은 홍위병의 몰락과 함께 사실상 끝났다. 나머지 몇 년은 병든 마오쩌둥의 궁정에서 벌어지는 암투로 번졌다. 린뱌오가 이끄는 군부, 마오쩌둥의 부인 장칭을 비롯한 4인방, 저우라이언의 관료들이 이권에 따라 이합집산을 하면서 파벌투쟁을 펼쳤다.
마오쩌둥은 죽기 전 병석에 누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문화대혁명은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다. 따라서 나는 이 과제를 다음 세대에 넘기고 있다. 평화롭게 물려주지 못할 수도 있고, 그럴 경우에는 혼란 속에서 물려주어야 할 수도 있다. 이것이 모두 실패하면 다음 세대에는 무슨 일이 생길까?”
문화대혁명과 관련한 내용은 새 책 ‘당과 인민’에서도 볼 수 있다. 저자인 브루스 J. 딕슨 조지워싱턴대 정치학과 교수는 “마오쩌둥이 (덩샤오핑 등이 이끄는) 성장으로의 정책 전환이 성공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달가워하지 않았다”면서 “그는 부유한 자본주의보다 가난한 공산주의가 더 낫다고 믿고 자신의 유토피아적 목표를 우선순위에 두고 문화대혁명을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혁명에 대한 마오쩌둥의 열정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홍위병과 마오쩌둥을 지지하는 다른 그룹들의 충돌, 사회적 혼란 등에 그가 곧 염증을 느꼈기 때문이다.
마오쩌둥은 “질서 회복”을 명목으로 젊은 급진적 지도자, 지역의 군 지휘관, 베테랑 정부 관리로 구성된 새로운 혁명위원회를 구성하며 출구 전략을 모색했다.
특히 당 위원회의 상당수를 문화대혁명 시기에 축출된 관료들로 채우며 그들에게 힘을 실어줬다. 그중에는 마오쩌둥 사후 중국 최고 지도자로 등극한 덩샤오핑도 있었다.
덩샤오핑은 다시 성장 중심의 개혁 작업에 속도를 냈다. 그가 기치로 내세운 건 문화대혁명의 구호 ‘조반유리’와 대치되는 ‘치부광영'(致富光榮)이었다. ‘부자가 되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라는 뜻이다.
▲ 문화대혁명 = 교유서가. 강진아 옮김. 252쪽.
▲ 당과 인민 = 사계절. 박우 옮김. 4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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