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 200일 앞둔 한반도 배경…”영웅담 아닌 독특한 디스토피아물”
(서울=연합뉴스) 황재하 기자 = “거창하게 말하자면 인간 존엄의 문제, 인간이 왜 존엄한지를 다뤘다고 생각해요. 그러려면 어느 정도 느린 호흡으로 충분히 등장인물을 바라볼 여유가 필요하지 않았나 생각했죠.”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종말의 바보’는 소행성이 지구에 충돌해 한반도가 멸망하기까지 200일 전부터 벌어지는 일을 다룬다. 인구의 3분의 1가량은 국외로 빠져나갔고,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사회 기능이 일부 마비됐다.
이런 설정만 들으면 일반적인 디스토피아, 포스트 아포칼립스 작품처럼 치열한 생존 투쟁기가 예상되지만, ‘종말의 바보’는 여러 인물이 어떻게 체념하고 종말을 받아들이는지 담은 휴먼 드라마에 가깝다.
‘종말의 바보’ 공개를 기념해 3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기자들을 만난 김진민 감독은 “생존 경쟁을 벌이거나 누군가가 여러 사람을 살려내는 서사라면 그건 영웅담이었겠지만, 이 작품은 애초에 그런 방향이 아니었다”고 설명했다.
김 감독은 “‘종말의 바보’는 종말의 시간을 고스란히 맞이해야만 하는 사람이 어떤 삶을 선택할지, 마지막 시간 동안 각각의 인물이 ‘나는 어떤 사람이었나’ 고민하는 이야기”라며 “제가 본 드라마 중에 이런 작품은 없었다”고 덧붙였다.
‘종말의 바보’는 중학교 교사 진세경(안은진 분)과 그의 남자친구이자 생명공학 연구원인 하윤상(유아인)을 중심으로 가상의 지역인 웅천시 마을 주민들이 어떻게 최후를 맞이하는지를 다뤘다.
세경은 철저히 이타적인 인물로, 곧 한반도가 멸망할 것을 알고도 아이들을 노리는 범죄자들을 단죄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미국에서 중요한 연구 성과를 눈앞에 두고 있던 윤상은 곧 멸망할 한국으로 돌아와 세경을 데리고 안전한 미국으로 가려 한다. 세경이 이를 거부하고 아이들과 함께 한국에 남으려 하자 윤상도 모든 것을 체념하고 한국에 남는다.
이처럼 살아남을 기회를 버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선택하는 세경과 윤상의 행동은 매우 감동적이지만, 현실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김 감독은 이에 대해 “흔히 하는 말 중에 ‘이렇게는 못 살겠다’는 게 있다. 세경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하는 질문을 스스로 던져서 가장 솔직하게 대답한 인물”이라고 해석했다.
또 “세경은 여러 등장인물 가운데 가장 이타적인 선택을 하는 인물인데, 그래야만 본인이 행복할 수 있고 200일이라도 살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한 것 같다”고 덧붙였다.
화려한 볼거리보다 인물들의 감정에 집중하고 과거 회상 장면이 유독 많이 등장하는 전개 방식 때문에 ‘종말의 바보’는 시청자 사이에 호불호가 엇갈리고 있다. 참신하고 인물들에게 공감이 간다는 평가도 있지만, 이야기가 혼란스럽다거나 너무 지루하다는 지적도 많다.
김 감독은 인터뷰에서 “공개 전부터 작품이 혼란스러울 수 있겠다는 우려가 있었는데, 실제로도 그런 반응이 꽤 있었다”며 “노력했는데도 우려한 반응이 나오는 것은 제가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편집할 때 서로 다른 버전이 스무 개 넘었다. 단순하게 시간 순서대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버전도 있었다”고 제작 과정의 고민을 털어놨다. 또 “지금보다 복잡할 수도 있었던 내용을 정리한 게 공개된 버전”이라고 덧붙였다.
‘종말의 바보’는 이미 2022년 8월께 촬영을 모두 마쳤고, 2023년 공개될 것으로 기대됐으나 주연배우인 유아인이 작년 상반기 마약류를 투약한 혐의가 드러나면서 시청자와의 만남이 다소 늦어졌다.
김 감독과 제작진은 유아인의 촬영분을 덜어내고 시청자의 불편함을 최소화하기 위해 작품을 다시 편집했지만, 핵심 배역인 유아인의 출연분을 전부 걷어낼 수는 없었다.
김 감독은 “유아인씨가 연기를 잘한 장면이라도 이야기 전개에 너무 많으면 빼자는 방향을 갖고 편집했다”며 “굉장히 많이 고민해서 내린 선택이었다”고 설명했다.
다만 김 감독은 “유아인씨가 등장하는 장면을 삭제하기 위해 다른 등장인물의 이야기가 침해돼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지키려 했다”고 덧붙였다.
김 감독은 처절한 복수극을 다룬 ‘마이 네임'(2021)과 범죄의 길을 선택하는 고교생의 이야기를 담은 ‘인간수업'(2020) 등 인간의 본성을 깊이 들여다보는 작품을 잇달아 연출했다. ‘종말의 바보’ 역시 화려한 볼거리보다는 인간의 본성을 들여다보기 위해 고심한 흔적이 느껴진다.
그에게 이런 작품들을 잇달아 연출한 이유를 묻자, 김 감독은 “저한테는 자꾸 그런 작품만 들어온다”며 웃어 보였다.
김 감독은 “사실 인간 본성을 다루는 드라마는 대개 도전적이거나 굉장히 고전적인 작품일 가능성이 크다”며 “편하게 볼 수 있을 만한 드라마는 저한테 연출 제안이 잘 들어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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