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말 알고 봐도 눈물이…배우의 시간 증명한 황정민의 ‘맥베스’

타락해가는 맥베스 완벽 소화…현대적이고 기이한 연출도 눈길

연극 ‘맥베스’ 공연 장면
[샘컴퍼니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연합뉴스) 오보람 기자 = “우리는 가련한 배우에 지나지 않는다. 인생은 바보들의 이야기일 뿐. 소음과 광기로 가득하지만, 아무런 의미도 없다. 바람아 불어라, 오너라 파멸아!”

결전을 앞둔 맥베스(황정민 분)가 이렇게 말하고는 결연한 자세로 칼을 뽑는다.

왕좌를 차지하기 위해 국왕을 시해한 뒤 벌벌 떨던 모습은 간데없다. 아내 레이디 맥베스(김소진)를 잃고 반란군까지 맞닥뜨린 그에게 남은 것은 오직 광기뿐이다.

맥베스는 살아 있는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자는 자신을 죽일 수 없다는 예언을 굳게 믿고서 의기양양하게 칼을 휘두른다. 하지만 “나는 어머니의 자궁을 찢고 나왔다”는 맥더프(남윤호)에게 일격을 허용한다.

존경받는 장군으로, 코더의 영주로, 스코틀랜드의 왕으로 군림하던 그는 마지막엔 잘린 머리로만 남는다.

지난 13일부터 서울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공연하고 있는 양정웅 연출의 연극 ‘맥베스’는 윌리엄 셰익스피어(1564∼1616)가 쓴 원작의 내용을 충실히 따라간다. 마녀의 꾐에 빠져 반역을 일으킨 맥베스가 점차 타락하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을 그린다.

400년 넘게 사랑받은 희곡을 바탕으로 한 이 작품이 새삼 감동적으로 다가오는 건 원작의 탁월한 서사 덕도 있지만, 맥베스를 연기한 황정민의 힘 덕분이기도 하다.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갈지 뻔히 알면서도 맥베스의 최후를 보며 그와 함께 눈물이 흐르는 이유다.

연극 ‘맥베스’ 공연 사진
[샘컴퍼니 제작. 재판매 및 DB 금지]

황정민은 앞서 ‘맥베스’ 제작보고회에서 꾸준히 연극에 도전하는 이유를 묻는 말에 “막이 올라가면 끝날 때까지 그 무대는 배우의 공간과 시간이 되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이를 증명하기라도 하듯 황정민은 미신과 탐욕, 아내의 부추김 사이에서 허우적대던 맥베스가 최고 권력자가 된 뒤 변화하는 과정을 섬세하고 처절하게 보여준다.

2시간 내내 방대한 양의 고어(古語) 대사를 쏟아내면서도 한 번의 흐트러짐도 용납하지 않는다.

1천200여석을 가득 채운 관객들은 개막 공연이 끝나자 모두 일어서 그에게 환호와 박수를 보냈다. 나머지 배우들이 모두 무대를 비우고 혼자 남은 황정민이 저승을 암시하는 듯한 문 안으로 걸어 들어가기까지 박수는 계속됐다.

양정웅은 원작의 대사를 최대한 살리면서도 현대적인 감각이 느껴지도록 극을 연출했다.

현대 복식을 한 등장인물들은 소총을 들고 있고, 화상통화를 하거나 게임기를 만지작거리는 장면도 나와 근미래나 판타지 속 세계를 배경으로 한 듯한 느낌을 준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음산하고 기이하다. 특히 세 마녀가 등장할 땐 공포 영화 못지않은 긴장감을 자아낸다. 원작과는 달리 남자로 설정된 이들은 맥베스를 직접 만나는 장면 외에도 그가 중요한 선택을 할 때마다 뒤쪽에서 귀신처럼 나타났다 사라진다.

이따금 무대를 향해 번쩍이는 빨간색·초록색 조명은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배가한다. 죽은 뱅코(송일국)가 피투성이가 된 모습으로 소리 없이 웃는 장면이 하이라이트다.

연극 ‘맥베스’ 공연 사진
[샘컴퍼니 제작. 재판매 및 DB 금지]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희미하게 한 점도 주목할 만하다. 극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 검은 옷차림의 남자들이 장대를 들고 객석 사이사이에서 나타난다. 이들은 끝에 까마귀 모양의 연이 달린 장대를 관객들 머리 위로 휘두르며 으스스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던컨 왕(송영창)은 객석 사이 복도를 걸으며 객석을 향해 “제비들이 많다”며 유머를 던지기도 한다. 이 밖에도 맥베스 부부가 핸드 마이크를 쥐고 관객에게 말을 걸거나 문지기가 관객의 무릎에 앉는 등 실험적인 시도가 돋보인다.

공연은 다음 달 18일까지.

rambo@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