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작가 수보드 굽타 “일상의 그릇에 우주가 들어있죠”

아라리오갤러리 개인전…”팬데믹 기간 오브제 바라보는 태도 전환”

‘프루스트 매핑’ 작업 앞에 선 수보드 굽타 작가[아라리오 갤러리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연합뉴스) 황희경 기자 = “저 (바닥이 탄) 냄비를 보세요. 누가 저 냄비로 요리했을까요. 누군지는 모르지만 상상할 수는 있죠. 저 냄비가 한 가정에서 십년 동안 쓰였다고 상상해 보세요. 얼마나 많은 가족 구성원이 행복한 기분으로, 웃음이 가득한 분위기에서 음식을 먹었을지 떠올려보세요. 저 많은 기물 속에 그만큼의 가족이 있다고 생각하면 무한대(의 이야기)로 가는 거죠.”

인도의 대표적인 현대미술 작가인 수보드 굽타(60)는 인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철제 도시락이나 자전거, 우유통 등 일상의 기물들을 재조합하거나 기념비적 크기로 재현하는 조각으로 유명한 작가다. 인도인들의 기물을 재해석해 일상적인 것에서 신성함을 발견해 온 그가 4일부터 서울 아라리오 갤러리에서 개인전 ‘이너 가든’을 연다.

수보드 굽타, ‘프루스트 매핑 III’, 2024[아라리오 갤러리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2014년 이후 10년 만에 한국에서 열리는 개인전에 나온 작품은 여전히 일상의 기물들이 재료로 쓰였지만 조금 결이 달라 보인다.

실제 인도인들이 사용했던 철제 식기들을 납작하게 펴고 그 위에 또 다른 식기들을 얹은 형태로 벽에 걸린 작품은 ‘프루스트 매핑’이다.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이다.

지난달 31일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프루스트의 책을 다 읽지는 않았지만, 마들렌을 베어 물며 기억을 떠올리는 그 부분이 내 작업과 매우 가깝다고 생각했다”면서 “어떻게 기억이 여행하는지 아는 것 같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작업실의 수보드 굽타[아라리오갤러리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작가는 ‘프루스트 매핑’ 속 여러 기물 중 가장 친숙한 그릇이 뭐냐고 물으며 기억을 떠올려보라고 했다.

“어떤 게 가장 친숙한가요? (스테인리스 스틸 대접을 가리키며) 아마도 이건가요? 무엇이 떠오르나요? 저 대접에 국수를 담아 먹었나요? 기억은 여행을 해요. 저 기물 안에 우주가 담겨 있죠. 제 우주는 저 접시 위에 있어요.”

이런 세계관은 또다른 작업 ‘이 질그릇 안에 일곱 개의 대양과 헤아릴 수 없는 별이 있다’에서도 드러난다. 질그릇을 반으로 쪼갠 뒤 그릇의 안이 보이도록 위아래로 배치하고 석고에 심어 넣은 역(逆) 부조 작업이다. 밖으로 드러난 그릇의 내부에는 오래된 청동에 생기는 녹의 피막인 ‘파티나’를 입혔다. 푸르스름한 파티나의 질감과 색채는 우주 공간의 무수한 별 같은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작품 제목은 인도의 시인인 카비르의 시에서 따온 것으로, 일상의 사물인 그릇이 내부에 만물의 우주를 품고 있음을 노래하는 구절이 굽타의 작품 세계와 일치한다.

수보드 굽타 ‘이 질그릇 안에 일곱 개의 대양과 헤아릴 수 없는 별이 있다’, 2024, 석고, 구리, 철, 녹(파티나), 61x14x85(h)cm[아라리오갤러리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작가는 코로나 팬데믹 기간 자신이 다뤘던 재료들을 다시 바라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팬데믹 기간 델타 바이러스에 감염돼 거의 열흘 정도 앓았어요. 2주 정도 지나고서야 괜찮아졌죠. 바이러스에 걸린 것은 나쁜 일이긴 했지만, 저는 그때가 최고로 좋은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해요. 모두가 한발짝 뒤로 물러나 삶을 어떻게 살고 싶은지 생각하게 됐죠. 저는 예술가로서 ‘좋아, 나도 뭔가를 해야지’라고 생각했고 꽃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죠. 그리고 이전과는 아주 다른 방식으로 재료들을 바라보기 시작했어요. 전에는 그저 하나의 오브제였다면 이제 그것들은 단순한 오브제가 아니에요. 이제 그 재료들에 깊은 의미가 있죠. 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됐죠.”

작가는 이런 변화가 잘 드러난 작품으로 ‘스투파’를 꼽았다. 인도 남쪽 지방을 여행하다 발견한 스투파(불교에서 부처나 훌륭한 스님의 사리를 안치하는 ‘탑’을 뜻하는 인도의 옛말) 모양에 일상의 여러 기물이 박혀 있는 작품이다. 이제는 성스러운 물건과 존경을 받는 존재들의 성물함 같은 의미를 지니는 스투파에 일상의 기물을 결합함으로써 작가는 기물들을 사용했던 사람들의 삶에 자신의 방식으로 일종의 경의를 표한다.

수보드 굽타, ‘스투파’ 전시 전경 [아라리오 갤러리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전시 제목과 같은 ‘이너 가든’ 연작은 조각과 회화로 구성됐다. 조각 작품의 화분에서 자라나는 꽃들은 자세히 보면 숟가락과 국자, 스테인리스 그릇 등 각종 주방 기물로 이뤄져 있다. 숟가락의 둥근 부분들이 모여 꽃봉오리를 이루는 식으로 주방 기물들로 꽃꽂이하듯이 구성한 작업이다.

수보드 굽타, ‘이너 가든 I, 2024[아라리오 갤러리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전시는 10월12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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