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읽은 세계…진은영 ‘나는 세계와 맞지 않지만’
술과 안주, 우리네 삶 이야기…권여선 ‘술꾼들의 모국어’
(서울=연합뉴스) 김용래 기자 = 치열한 감수성과 예리한 사회 인식을 담은 시들로 사랑받아온 시인 진은영과 어느덧 한국 소설의 대표 얼굴 중 하나로 자리매김한 작가 권여선이 가을 향기 물씬 나는 에세이로 독자들을 찾아왔다.
진은영의 테마는 위대한 작가와 그들이 쓴 불멸의 책, 권여선의 테마는 술과 음식에 얽힌 우리네 삶이다. 두 작가의 각기 결이 다른 개성과 매력이 담겨 이채로운 산문집들이다.
먼저 진은영은 신작 산문 ‘나는 세계와 맞지 않지만'(마음산책)을 통해 자신이 꼼꼼히 읽어낸 작가들의 책과 삶을 통해 포기하지 않는 읽기의 힘을 강조한다.
시인에게 있어 좋은 작가란 독자와 세상에 아첨하지 않는 존재들이다.
“(좋은 작가는) 오랜 친구처럼 우리에게 진실의 차가운 냉기를 깊이 들이마시라고 무심한 얼굴로 짧게 말한다. (중략) 이들은, 내 책을 읽는다면 넌 아침에 슬펐어도 저녁 무렵엔 꼭 행복해질 거라고 말하지 않는다.”
위대한 작가가 손쉬운 위로 대신 택하는 것은 “너는 고통이란 고통은 다 겪겠지만 그래도 너 자신의 삶과 고유함을 포기하지 않을 거라고” 뼈아프게 말해주는 일이다.
시인은 하이데거, 아렌트, 카뮈, 바슐라르 등 대가들의 명저들을 꼼꼼히 읽은 뒤 자신의 독서를 현재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소수자에 대한 억압, 차별금지법 제정 반대, 사회적 참사와 집단적 슬픔 등의 현상과 연결 짓는다. 나아가 애도와 사랑, 예술의 힘과 진정한 공감에 대해서도 섬세하고 유려한 목소리로 적어 내려간다.
산문집 전체를 관통하는 눈에 띄는 주제 중 하나는 ‘애도’다.
미국의 시인 앤 카슨이 오빠의 죽음에 직면해 그의 삶과 존재를 기억하며 쓴 책 ‘녹스’를 읽고서 시인은 이태원 참사를 떠올린다.
“2022년 우리가 거리에서 많은 젊은이를 잃고서 치러야 했던 사회적 제의가 공허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 핵심이 전부 생략되어 있기 때문이다. 위패도 사진도 없는 분향소에서 우리는 고인에 대한 어떤 이야기도 하지 못하고 듣지 못한 채 누군지도 모르는 고인을 애도하고 추모했다. 세상을 떠난 당신이 누구였는지 알고 기억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바로 그 제의에서 말이다.”
프랑스의 구조주의 철학자이자 문필가였던 롤랑 바르트가 사진에 관한 철학적 성찰을 담아 쓴 명저 ‘밝은 방’을 읽고서는 이런 단상을 적는다.
“우리는 떠난 이들을 쉽게 보내지 못하고 그들이 분명 존재했다는 사실을 담아서 ‘밝은 방’에 자꾸 쌓아두려고 한다. 네가 거기 있었지. 나는 너를 보았지. 이제 안녕, 안녕…. 언제나 사진은 작별 인사인 동시에 지금 곁에 없는 너와 만나는 재회의 인사다.”
이외에도 시인은 카뮈의 ‘시지프의 신화’, 시몬 베유의 ‘중력과 사랑’ 등을 읽고서 독자들에게 자신의 사려 깊은 독후감을 조곤조곤 전해준다.
진은영의 에세이가 꽤 진중한 분위기라면, 권여선의 산문 ‘술꾼들의 모국어'(한겨레출판)는 제목에서 느껴지듯 경쾌하고 재치 있게 써내려 간 책이다.
문단의 소문난 애주가로, 술과 안주를 모두 애정하는 작가가 음식과 술에 얽힌 정다운 추억담들을 한 보따리 가득 풀어놓는다.
특히, 가을의 문턱에서 가을 음식에 관해 쓴 부분은 단연 눈길과 입맛을 사로잡는다.
“봄에 싹텄던 것들은 여름에 왕성히 자라 마침내 가을이면 완숙에 이른다. 그런 의미에서 맛에 있어서만은 가을이 쇠락의 계절이 아니라 절정의 계절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그 절정은 단맛으로 표현된다. 모든 먹을거리들은 가을에 가장 달콤해진다.”
이렇게 침을 고이게 하는 소개 끝에 작가가 들이민 식재료는 “연하게 사각거리고 시원한 단맛이 배어 있는” 가을무다.
갈치를 가을무에 졸여 햅쌀로 갓 지은 밥에 얹어 먹으면 “끝없이 달고 달고 다디단 가을의 무지개” 같은 맛이 난다고 작가는 환호작약한다.
소설, 희곡, 시나리오 등을 쓰는 전업 작가들이 모이는 레지던시 프로그램에서 작가들이 좀 친해지면 가장 많이 얘기하는 주제도 문학이나 정치가 아니라, 바로 먹는 것이다.
“대부분 먹는 얘기다. 먹고 싶은 음식 얘기, 옛날에 먹었던 음식 얘기, 맛있는 음식 파는 집 얘기, 맛있는 음식 만드는 레시피 얘기, 외국 여행 가서 먹었던 신기한 음식 얘기 등등 다들 갈고닦은 언어 감각을 총동원하여 먹는 얘기에 집중한다.”
작가에 따르면 술꾼은 모든 음식을 안주로 일체화시킨다. 맛없어 보이는 음식도 소주 한잔과 함께라면 극강의 안주로 거듭나는 게 바로 술이 가진 마법이다.
“그래서 말인데 옛날 허름한 술집 문이나 벽에 붙어 있던 ‘안주 일체’라는 손글씨는 이 땅의 주정뱅이들에게 그 얼마나 간결한 진리의 메뉴였던가.”
술, 안주, 음식에 얽힌 갖가지 이야기들을 작가 특유의 입담으로 재치 있게 풀어낸 이 책은 권여선이 2018년 출간한 그의 유일무이한 산문집 ‘오늘 뭐 먹지?’의 전면 개정판이다.
제목을 완전히 바꾸고 본문 삽화를 전면 교체하는 한편, 작가 인터뷰도 수록했다. 또 개정판 초판에 한정해 작가의 초단편소설 ‘자전거, 캔맥주, 그리고 곰’도 함께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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