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표 미술감독 류성희 “한국 영화 멋있단 말 듣는 게 목표”

부산국제영화제 까멜리아상 첫 수상자…”판타지와 SF에 관심”

류성희 미술감독
[부산국제영화제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부산=연합뉴스) 이영재 기자 = 영화는 이야기의 감동이나 배우의 매력 못지않게 한 장면의 아름다움으로 관객의 기억에 남곤 한다. 영화 속 장면 하나하나의 미학적 완성을 담당하는 사람이 바로 미술감독이다.

류성희(56)는 오랜 기간 한국영화의 미장센을 책임지며 어느덧 한국을 대표하는 미술감독하면 떠오르는 중요 인물이 됐다.

박찬욱의 ‘올드보이'(2003), ‘박쥐'(2009), ‘아가씨'(2016), ‘헤어질 결심'(2022), 봉준호의 ‘살인의 추억'(2003), ‘괴물'(2006), 윤제균의 ‘국제시장'(2014), 최동훈 감독의 ‘암살'(2015)의 멋진 미장센이 그의 손길에서 나왔다.

류 감독은 ‘아가씨’로 제69회 칸국제영화제에서 미술을 포함한 영화의 기술적 성취를 이룬 아티스트에게 수여되는 벌칸상을 한국인 최초로 받았다.

그는 5일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가 열리고 있는 부산 해운대구 영상산업센터에서 열린 간담회에서 “‘한국 영화 멋있다’라는 말을 들을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영화제에서 류 감독은 새로 제정된 까멜리아상의 첫 수상자로 선정됐다. 영화 제작 현장에서 여성 지위를 높이는 데 기여한 사람에게 수여되는 상이다.

류 감독은 미술감독이라는 직업 자체가 생소하던 시절 한국 영화계에서 여성에 대한 온갖 편견을 이겨내고 세계적인 미술감독의 자리에 올랐다.

홍익대 도예과를 나와 미국영화연구소(AFI)에서 영화를 공부한 류 감독은 미국에서 서부영화 촬영 현장에 있다가 문득 ‘내가 서양인이 하는 걸 답습하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어 열흘 만에 짐을 싸 한국으로 돌아왔다.

당시만 해도 한국 영화계에선 장르적 색채가 뚜렷한 장르영화는 남성의 전유물이었다. 여기에 굴하지 않고 장르영화의 문을 고집스럽게 두드리던 류 감독에게 기회를 열어준 것은 당시 신진 감독이던 박찬욱, 봉준호, 류승완 감독이었다.

류성희 감독은 “모든 제작자가 나를 거절했지만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기를 맞아 새로운 감독들이 나오면서 내게도 기회를 주기 시작했다”고 돌아봤다.

류성희 감독에게 칸영화제 벌칸상 안겨준 영화 ‘아가씨'(2016)
[연합뉴스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요즘 영화 촬영 현장은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여성의 활동이 활발하다는 게 류 감독의 말이다.

류 감독은 “미술 부서에 한정해서 보자면 여성이 충분히 리더 역할을 하고 있다”며 “남성이 들어오면 ‘과연 잘할 수 있을까’라는 말이 나오는 역(逆) 편견도 존재할 정도”라고 말했다.

그러나 영화계 전반적으로 보면 아직도 여성에 대한 유리 천장은 남아 있다.

류 감독은 후배 여성 영화인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뭐냐고 묻자 “성별을 떠나 자신이 꿈꾸는 것을 분명하게 잡고 그것으로 박차를 가해 탁월함에 이른다면 편견은 어느덧 바뀌어 있을 것”이라며 “편견 자체와 부딪쳐 싸우다 보면 힘에 부쳐 나가떨어질 수 있다”고 답했다.

그는 장벽처럼 느껴졌던 장르영화를 오히려 더 열심히 갈고 닦은 자기 경험을 언급하며 “벽과 부딪쳐 싸우기보다는 그것을 문으로 만드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조언하기도 했다.

류 감독은 “지금은 사람들이 나를 부를 때 ‘여성 미술감독 류성희’라고 하지 않고 ‘미술감독 류성희’라고 한다. 이것을 위해 지금까지 노력했다”며 웃었다.

어린 시절부터 영화와 음악을 좋아한 그를 영화인의 길로 이끈 것은 데이비드 린치의 ‘엘리펀트 맨'(1980)이었다. 그는 “그 영화를 보고 처음으로 미(美)와 추(醜)가 무엇일까 생각했다”고 회고했다. 류 감독은 스탠리 큐브릭 감독에 대해선 “그의 모든 영화가 미술적으로 내 교과서”라고 했다.

앞으로 하고 싶은 장르로는 판타지와 SF를 꼽았다.

류 감독은 “우리 관객이 공감할 수 있는 상상으로 만들어진 판타지와 SF로 전 세계인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때가 올 때까지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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