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오보람 기자 = 이정홍 감독의 영화 ‘괴인’에서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건 괴이한 분위기의 포스터다.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남자가 뱅뱅이 안경을 낀 채 정면을 바라보는 흑백 사진이다. ‘당신도 나처럼 이상하잖아요’라는 문구가 가슴팍에 띄워져 있다.
대체 얼마나 괴상한 사람일지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할 것 같지만, 주인공인 기홍(박기홍 분)은 그렇게 이상한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괴인보단 범인(凡人)에 훨씬 더 가까운 사람이다.
영화는 평범한 이 남자의 일상을 떼어내 스크린에 옮긴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기승전결이 뚜렷하지 않고 큰 위기나 갈등도 없어 전형적인 영화의 틀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코미디 장르도 아닌 이 영화가 피식피식 웃음을 유발하는 마법을 부린다.
살면서 1만명쯤은 마주쳤을 법한 보통의, 어쩌면 보통 이하의 사람을 보는데도 고도의 집중력이 발휘된다. 이유가 뭘까.
아마 기홍의 다면적인 얼굴에서 우리의 모습이 보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가 일상에서 맺는 관계나 겪는 일이 예상과는 다른 갈래로 전개되는 것도 우리네 삶을 닮았다.
기홍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는 “노가다 중 그나마 엘리트”인 인테리어 목수다.
일거리가 떨어지면 손가락을 빨아야 하는 처지지만,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돈을 쓸어 담고 있다며 허세를 부린다.
그의 성격이나 말투, 행동은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계속해서 바뀐다.
부모님에게 무심하기만 한 아들인 그는 어린 여자 고객 앞에선 필요 이상으로 넉살 좋은 아저씨가 된다. 자신이 부리는 전기기사에게는 악덕 업주가 됐다가 집주인 정환(안주민)에게는 한없이 공손한 세입자로 돌변한다.
정환이나 그의 아내 현정(전길)과의 관계 역시 집안 보이지 않는 선을 넘으며 점차 변한다. 특히 정환과는 매일 같이 함께 술잔을 기울이고 테니스도 치면서 둘도 없는 친구가 된다.
이 영화에는 사건이라고 할 만한 것이 딱 하나 등장한다. 기홍의 업무용 차량 지붕이 갑자기 찌그러진 일이다. 기홍은 정환과 함께 범인을 추적한다.
범인의 정체가 조금씩 드러나면서 긴장감도 커진다. 드디어 이 작품의 본론이 나오는 건가 싶을 찰나, 영화는 다시 관객을 ‘우연과 관계’라는 주제 속으로 끌어당긴다.
‘괴인’의 힘은 절반 이상이 배우에게서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이 떠들고 놀고 갈등하고 술 마시는 모습이 무척 자연스러워 다큐멘터리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가만히 앉아 스크린 속 인물을 보고 있으면 어느새 러닝타임이 훌쩍 흘러가 있다.
놀라운 건 박기홍을 포함해 대부분의 출연진이 연기 경험이 전무한 일반인이라는 점이다.
박기홍은 이 감독의 오랜 친구다. 이 감독의 긴 설득 끝에 출연을 결심했고, 그 덕에 영화 속에서 기홍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있었다. 안주민은 이탈리아 정통 피자를 만드는 셰프, 전길은 쌍둥이 자매를 둔 엄마다.
이 영화는 ‘해운대 소녀'(2012), ‘반달곰'(2013), ‘창밖의 풍경'(2014) 등 단편으로 주목받은 이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뉴 커런츠 상을 받는 등 4관왕에 올랐으며 이후 제48회 서울독립영화제에서는 대상 트로피를 가져갔다. 제11회 무주산골영화제에서는 감독상과 영화평론가상을 받았다. 시드니영화제, 홍콩아시안영화제 등 해외 영화제에도 초청됐다.
8일 개봉. 136분. 15세 이상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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