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탄한 이야기에 한해인·이한주·오만석 빼어난 연기
(서울=연합뉴스) 이영재 기자 = 재이(한해인 분)가 침대에서 일어나는 동안 남자친구 건우(이한주)는 아침을 준비한다.
두 사람은 식탁에 마주 앉아 토스트와 샐러드를 먹고 간밤의 꿈 얘기를 하면서 하루를 시작한다.
신인 작가 재이와 학원 강사 건우는 결혼하지 않고 동거하는 커플이다. 아이를 안 가지려고 피임에도 신경을 쓴다.
그렇게 별 탈 없이 흘러갈 것만 같던 둘의 관계는 재이가 임신하게 되면서 흔들리기 시작한다.
유지영 감독의 신작 ‘나의 피투성이 연인’은 예상치 못한 임신으로 파국을 맞게 되는 젊은 커플의 가슴 아픈 이야기다.
재이와 건우의 삶은 보이지 않는 균형점 위에 있다. 여기엔 결혼도 출산도 하지 않는다는 묵시적인 합의가 있다.
가족의 삶으로 들어가지 않고 연인의 관계를 이어가는 것이다. 경제적으로는 예술가인 재이가 노동자인 건우에게 의존한다.
재이의 임신으로 둘의 관계에 균열이 생긴다. 재이는 아이를 지우려고 하지만, 건우는 “혼자 결정할 문제가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누가 봐도 잘 맞는 커플로 보이던 두 사람이 사실은 서로를 깊이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게 드러난다.
재이와 건우가 각각 속한 세계도 동떨어져 있는 듯하다. 건우는 학원에서 노동 착취와 갑을 관계를 겪으면서도 부조리를 못 본 척할 수밖에 없고, 그럴 때마다 표정이 일그러진다.
재이와 동료 작가들은 대중의 입맛에 맞는 히트작을 쓰려고 전전긍긍한다. 공모전에서 상이라도 받으면 죽었다가도 살아난 것 같고, 선망과 함께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된다.
진정한 예술은 비참한 현실에서 피어나 그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를 위로하고 힘을 주지만, 예술과 현실은 유리될 때가 많다. 재이와 건우의 관계가 그걸 보여주는 것 같다.
이 영화는 여성의 임신과 출산 문제에 주목해 페미니즘의 시각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그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는 느낌이다.
상영 시간이 두 시간 반으로 긴 편이긴 해도 이야기가 늘어지지 않고 탄탄하게 전개돼 지루하지 않다.
특히 재이가 병원에 실려 가고 건우가 동료들과 회식하는 장면이 반복적으로 교차하면서 클라이맥스로 나아갈 땐 상당한 긴박감을 준다.
디테일 하나하나에 신경 쓴 점도 눈에 띈다. 건우가 책상에 앉아 연필을 깎는 장면은 묘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가로등이 고장 난 것도 이야기와 직접적인 관계는 없지만, 나중에 재이가 지나가 버린 사랑을 추억하게 하면서 깊은 울림을 낳는다.
유 감독이 ‘수성못'(2018)에 이어 5년 만에 내놓은 장편이다. 그는 이 작품을 “상처투성이 과거에 대한 반성이자 서늘한 성장담”이라고 소개했다. 그만큼 자전적 요소가 강하다는 얘기다.
한해인, 이한주, 학원 원장 역의 오만석은 빼어난 연기를 펼친다. 이들은 어디선가 본 듯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줄 정도로 캐릭터에 생동감을 불어넣는다.
‘나의 피투성이 연인’은 동유럽의 칸영화제로 불리는 제57회 카를로비 바리 국제영화제에서 프록시마 경쟁 부문 대상을 받았고,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선 시민평론가상을 받았다.
15일 개봉. 155분. 12세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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