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가 영혼이 깃든 집이 배경…”세실극장과 잘 어울린다는 생각 들었죠”
10m 높이의 검은 박스로 집 표현…”관객 상상하게 만드는 표현 추구”
(서울=연합뉴스) 최주성 기자 = “방치된 공간이었던 세실극장에서 오랜 시간 버려진 집 이야기를 하면 잘 어울리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곳에서 사랑과 위로, 공감을 이야기하면 좋겠다 싶었죠.”
독일의 외딴 숲속에 25년간 방치된 집에 엠마라는 무용수가 찾아온다. 그곳을 가꾸던 엠마는 죽음을 선택하기 위해 숲을 찾아온 이들이 머물 수 있는 여관을 운영하기 시작한다. 엠마의 집에 머무는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비로소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연극 ‘키리에’의 전인철 연출(48)은 작품의 줄거리가 공연장인 세실극장의 이야기와 닮아있다고 생각했다. 세실극장은 70년대 소극장 연극을 이끌었지만, 폐관과 재개관을 반복하며 사라질 뻔한 위기에 놓인 곳이었다. 전 연출은 세실극장을 관객에게 잠깐의 휴식을 선사하는 공간으로 만들고자 했다.
전 연출은 오는 30일 공연 개막을 앞두고 최근 국립정동극장에서 연합뉴스와 만나 “시청 앞은 늘 혼란스러운 공간이지만 바로 옆 세실극장에 들어가면 고요하고 쓸쓸한 느낌을 받는다”며 “연극을 보는 관객들도 작은 정원에 온 것처럼 잠깐의 여유와 공감을 얻길 바란다”고 말했다.
‘키리에’에 등장하는 집은 설정과 연출 면에서 독특한 점을 가지고 있다.
먼저 그곳은 30대의 나이로 과로사한 건축가의 영혼이 깃든 공간이다. 일밖에 모르던 건축가는 여느 때처럼 잠이 들었다 깨어난 뒤 집이 되어버린 자신을 발견한다. 건축가의 영혼은 엠마를 만나기 전까지 아무도 없는 집에서 홀로 시간을 보내며 지나간 시간을 떠올린다.
의인화된 집이 다른 배우와 상호작용을 주고받는 것도 특징이다. 집을 연기하는 배우 최희진은 목소리로 등장하거나 직접 무대에 올라 배우와 대사를 주고받는다. 집은 다른 이들과 소통하기 시작하면서 타인의 아픔을 이해하고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전 연출은 “장영 작가의 대본에서 건축가의 영혼이 깃든 집이라는 설정이 고통스러우면서도 신비롭게 느껴졌다”며 “집에 깃든 영혼이 그곳을 찾아온 엠마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과정에서 변화하는 이야기”라고 설명했다.
관객이 상상력을 바탕으로 채워가야 하는 부분이 많은 작품이다. 소품은 집을 상징하는 10m 높이의 검은 박스와 의자가 거의 전부다. 전 연출은 지난달 연극 ‘지상의 여자들’에서도 관객이 상상으로 이야기를 채워가는 연출 방식을 택했다.
그는 “배우들이 재현을 통해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관객을 상상하게 만드는 표현을 추구한다”며 “숲속을 표현하는 음향효과 등을 활용해 관객의 상상을 도울 것”이라고 밝혔다.
작품은 집을 둘러싼 이야기를 통해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넘어 인간과 사물의 교감까지도 담아낸다. 제목인 ‘키리에’는 가톨릭에서 인간을 향한 자비와 종교적인 사랑을 의미하는 단어이지만, 작품에서는 보다 큰 의미의 사랑을 품은 단어로 쓰인다.
전 연출은 “인간과 사물의 공감은 쉽게 말하면 오래 산 집에 정이 드는 것과 같은 이치”라며 “일상에서 마주치는 사랑의 형태와 구별되는 이야기로 신비로운 감정을 전달하고 싶다”고 밝혔다.
2006년 연극 ‘고요’로 데뷔한 중견 연출가인 그는 연극 연출을 스스로에 대한 반성의 계기로 삼는다. 이번 작품에서는 타인의 상처와 고통에 관심을 가지지 못했던 자신에 대한 반성을 담았다고 한다.
“연극을 준비하며 스스로 타인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지 못하고 살아오지 않았나 돌아보게 됐어요. 연극을 통해 제가 타인을 공감하는 과정을 관객과 나누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작품은 국립정동극장 세실에서 다음 달 11일까지 공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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