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한부 인생이 됐을 때 비로소 보이는 것…영화 ‘리빙’

구로사와 감독 ‘이키루’ 원작…노벨문학상 가즈오 이시구로 각본

‘리빙: 어떤 인생’의 한 장면
[티캐스트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연합뉴스) 이영재 기자 = 일본의 거장 구로사와 아키라(1910∼1998) 감독의 ‘이키루'(1952)는 산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하게 해주는 명작이다.

이 영화를 본 사람은 주인공 와타나베가 죽음을 바라보면서 깊은 회한을 담아 부르는 “인생은 짧으니 사랑을 하세요”라는 노랫말을 잊지 못할 것이다.

2017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일본계 영국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는 이 영화에 각별한 애정을 가졌다. 영국을 배경으로 ‘이키루’를 리메이크하기로 한 그는 각본을 썼을 뿐 아니라 기획과 제작에도 나섰다.

그렇게 탄생한 영화가 올리버 허머너스 감독의 신작 ‘리빙: 어떤 인생'(이하 ‘리빙’)이다. 이 영화는 배경을 1950년대 영국으로 옮겼을 뿐, 이야기의 흐름은 ‘이키루’를 거의 그대로 따랐다.

주인공 윌리엄스(빌 나이 분)는 런던시청에서 근무하는 공무원이다. 누가 봐도 번듯한 영국 신사의 모습이다.

그에게 삶이란 매일 같은 시각에 타는 통근 열차, 부하 직원이 책상에 놔두고 가는 서류, 동료들과 때때로 주고받는 의미 없는 농담 같은 것들이다.

새로울 것도, 달라질 것도 없다. 산다는 게 뭔지 굳이 생각할 필요도 없다. 그저 시간의 흐름에 모든 걸 맡기고 천천히 늙어간다.

그런 윌리엄스가 암에 걸려 길어야 9개월밖에 못 살 거라는 진단을 받는다. 그는 자기 삶이 뭔가 총체적으로 잘못된 게 아닌가 하는 고민에 빠진다.

윌리엄스는 구약성경의 전도서를 썼다는 옛 현인처럼 삶의 의미를 찾아 유흥에도 흠뻑 빠져 보고, 시청 일을 그만둔 생기발랄한 젊은 여성 해리스(에이미 루 우드)와의 만남에서 답을 찾아내 보려고도 한다.

‘리빙: 어떤 인생’의 한 장면
[티캐스트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이 영화는 윌리엄스의 장례식에 모인 사람들이 내놓는 이런저런 회고의 말을 통해 그가 자신에게 남은 얼마 안 되는 시간에 뭘 했는지 보여준다.

주제 면에선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의 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과 궤를 같이한다. 원작인 ‘이키루’가 이 소설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리빙’은 영국 신사로 대변되는 중산층의 삶에 대한 문제 제기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진정한 삶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맞닥뜨리게 될 보편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를 단순하고 재미있는 이야기와 아름다운 영상에 담아낸 게 이 영화의 강점이다.

극적인 표현력에선 ‘이키루’에 못 미치지만, 흑백 영화가 낯선 요즘 관객에겐 ‘리빙’이 더 맞을 수도 있어 보인다.

‘러브 액츄얼리'(2003)에서 망가진 록스타를 연기해 웃음을 안겨준 관록의 배우 빌 나이는 데뷔한 지 47년 만에 ‘리빙’으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뷰티'(2011)로 칸 영화제 퀴어종려상을 받은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의 허머너스 감독은 일본 영화 ‘이키루’를 영국적인 느낌으로 재창조해내는 연출력을 발휘했다.

‘리빙’을 기획한 가즈오 이시구로는 감독과 주연 배우 선정에도 깊이 관여했다고 한다. 그가 각본을 쓴 이 영화는 아카데미 각색상 후보에도 올랐다.

13일 개봉. 102분. 12세 관람가.

‘리빙: 어떤 인생’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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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jglory@yna.co.kr